오늘날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태어나면서 갖게 된 이름 하나만을 평생 동안 사용한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은 최소한 셋 이상의 호칭을 지니고 있었다. 명(名)과 자(字)와 호(號)가 바로 그것이다.
명(名)이란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름과 같다. 자(字)는 관례(冠禮:성인식)를 치르고 짓는데, 그 까닭을 유학의 경전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서는 “이름(名)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고 밝히고 있다. 즉 이름(名)을 귀중하게 여겨서 관례를 치르고 나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자(字)를 지어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단 자(字)를 지을 때는 함부로 짓지 않고, 반드시 이름(名)과 연관 지어 짓도록 했다.
관례는 대개 15~20세 때 행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명(名)과 자(字)는 부모나 어른 혹은 스승이 지어주는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지어 사용할 수 없었던 반면 호(號)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뜻한 바 있거나 마음이 가는 사물이나 장소에 따라 또는 어떤 의미를 취해서 제멋대로 지을 수 있고 혹은 다른 사람이 지어 줄 수도 있는 호칭이다.
예를 들면 율곡(栗谷:이이)과 연암(燕巖:박지원)은 자신이 좋아하는 지명(地名)으로 호(號)를 삼은 것이고, 퇴계(退溪:이황)와 초정(楚亭:박제가)은 마음에 품고 있는 뜻과 의지를 호(號)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다산(茶山:정약용)과 석치(石癡:정철조)는 자신의 기호나 취향을 좇아 호(號)를 지었으며 완당(阮堂:김정희)과 오원(吾園:장승업)은 존경하거나 본받고자 하는 인물의 이름(혹은 호)을 따와서 호(號)로 삼았다. 삼혹호(三酷好:이규보)와 어우당(於于堂:유몽인)은 스스로를 희화화한 아주 해학적인 호(號)다.
이렇게 보면 명(名)과 자(字)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생물학적 자아(태생적 자아)에 가깝다면 호(號)는 선비가 자신의 뜻을 어디에 두고 마음이 어느 곳에 가 있는지를 나타내는 이른바 사회적 자아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호(號)를 살펴보면 그의 사람됨과 더불어 그 삶의 행적과 철학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필자는 앞으로 호(號)를 통해 조선을 대표할 만한 선비들의 다채로운 삶과 철학을 추적해보려고 한다. 이 여정을 통해 ‘호(號) 문화’가 지니는 가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는 유산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여정의 첫 주인공으로 이덕무를 선택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북학파(北學派)와 백탑시사(白塔詩社)의 중추(中樞)
이덕무는 서자 출신의 가난한 선비였다. 그러나 그는 18세기 조선의 지성사를 빛낸 ‘북학파(北學派)’의 핵심 멤버였고, 규장각(奎章閣) 4검서관(四檢書官)의 한 사람으로 정조(正祖)의 ‘문예부흥’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더욱이 문학사(文學史)에서 볼 때 조선 후기의 한시 4가(四家: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즉 백탑시사(白塔詩社)를 대표하는 큰 시인으로 ‘기궤첨신(奇詭尖新:기이하고 괴이하며 날카롭고 새롭다는 뜻)’이라는 전무후무한 시풍(詩風)을 세워 청나라에서까지 명성을 떨쳤다.
특히 ‘북학파’의 지식인들은 북쪽의 청나라를 통해 외부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조선을 크게 개혁해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이루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공유하면서도 각자 특정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의산문답>을 저술한 홍대용은 천문지리(天文地理) 과학에서,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은 문장으로, <북학의>를 쓴 박제가는 사회개혁론에서, <발해고>를 저술한 유득공은 역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덕무는 어떠했는가? 그는 <청장관전서>라는 백과사전적 저술과 기록을 통해 18세기 당시 신학문이었던 ‘고증학과 변증론’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이덕무는 인문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과 비교하면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2012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차태현이 희화화시켜 연기한 이덕무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왜 다른 유명한 ‘북학파’ 지식인들을 제외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덕무를 소개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한국사를 통틀어도 이덕무만큼 ‘호(號)’를 통해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호(號)에 관한 한 생전에 100여개의 호(號)을 사용했던 추사(秋史) 김정희와 견줄만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덕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수많은 호(號)를 사용했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매번 글을 지을 때마다 새로운 호(號)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덕무는 왜 이토록 많은 호를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 때문에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당대(18세기)를 넘나들며 백과사전적 지식을 탐구하고 기록으로 남겼던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즉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변신을 모색한 그의 호기심과 지식욕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호(號)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