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 정약용…남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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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정약용…남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1.1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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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②

 

▲ 정약용의 초상. 정약용은 친가(親家)와 외가(外家) 모두 학문과 시문(詩文) 그리고 서화(書畵)로 일세를 풍미한 남인(南人)의 명문가였다.

여유당(與猶堂)…“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여유당(與猶堂)’은 ‘다산(茶山)’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대표적인 호(號)다. 그가 생전에 저술한 정치·경제·인문·사회·자연과학·기술 분야를 총망라한 500여권의 서적들을 모두 모아 간행한 전서(全書)의 제목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이고, 또한 뒷산에 정약용 부부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그의 고향 마을 생가에 오늘날에도 당당하게 걸려 있는 당호(堂號) 역시 여유당(與猶堂)이다.

그러나 여유당이 담고 있는 뜻은 사실 자랑스럽거나 당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부끄러웠던 우리 역사의 단면(單面)을 보여줄 뿐이다. 여유당이란 호는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남인(南人)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쟁(黨爭)이 격렬했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에게 당파(黨派)는 자신이 어느 집안에 태어났느냐 만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즉 당색(黨色)과 혈통(血統)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사대부를 따라다닌 꼬리표와 같았다. 사대부가 자신이 속한 당파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혈통과 가문을 부정하는 행위와 동일하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조선의 사대부라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정약용은 친가(親家)와 외가(外家) 모두 학문과 시문(詩文) 그리고 서화(書畵)로 일세를 풍미한 남인(南人)의 명문가였다. 그의 친가 직계 선조는 8대가 연이어 문신(文臣)의 꽃이라고 하는 옥당(玉堂:홍문관)에 오를 만큼 대학자를 다수 배출했고, 외가는 남인의 영수(領袖)이자 대문장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문인화가(文人畵家)로 큰 명성을 얻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가문인 해남(海南) 윤씨(尹氏)다.

특히 정약용이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갖추어진 자기 집안의 가풍(家風)에 대해 언급한 ‘제가승초략(題家乘抄略)’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그가 조선을 대표할 만한 학문의 대가(大家)이자 개혁가(改革家)였지만 자신의 재능과 식견을 겉으로 드러내는데 꽤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의 집안에는 유별난 기풍(氣風)이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첫째는 ‘근(謹:삼가다)’이라고 할 수 있다.…윗사람의 뜻에 순종하여 비리를 저지르거나 권세가를 추종하여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둘째는 ‘졸(拙:서툴다)’이다.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앞날에 대한 염려를 먼저 해 밖으로는 겁을 먹은 듯하지만 실제 속마음은 굳세고 강건해 권력을 차지하거나 경쟁하는 일에 항상 몸을 사리고 나서지 않았다.…셋째는 ‘선(善:착하다)’이다.…누구를 원망하거나 악(惡)을 악(惡)으로 보복하지 않았다.…넷째는 ‘양(諒:믿음직하고 성실하다)’이다.…집안사람 중 명망이 있는 어떤 사람도 한 마디라도 거짓되고 허황된 말을 해 다른 사람에게 낭패를 당했다는 일을 듣지 못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가승초략(題家乘抄略)’-

정약용은 18세기 중반인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났다. 이때 조선은 이미 숙종(肅宗)과 경종(景宗) 시대의 당쟁에서 최종 승리한 서인(西人) 계열의 노론(老論) 세력이 권력을 독점지배하고 있었다. 숙종 시절 서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남인은 권력의 핵심부에서 배제당한 채 벼슬살이를 하거나 아니면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와 같은 정치 상황 때문에 어느 당파보다 남인 계열의 사대부로부터 비판적인 현실 인식과 사회개혁론이 많이 나왔다. 또한 외부 세계에 대해 폐쇄적이었던 노론의 보수적 성리학자들과는 다르게 남인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신문물 특히 천주교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 가운데에서도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천문·지리·인사는 물론 유학의 경사(經史)를 총망라하는 지식을 펼쳐 보이는 한편 서양의 과학기술과 신문물을 폭넓게 수용한 백과전서적인 학풍을 남겼다. 이익은 숙종 시대 당쟁에 휘말려 아버지와 형이 죽음에 이르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낙향한 후 학문에만 열중해 조선 최고의 백과사전인 『성호사설(星湖俟說)』을 남겨 실학(實學)의 큰 문을 활짝 열어 제친 인물이다. 실학파(實學派) 중 최대 규모의 인물을 배출한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은 모두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맹자가 공자를 사숙해 유학의 아성(亞聖)이 되었듯이 정약용은 성호 이익(사진)을 사숙하면서 실학의 최고 학자가 될 수 있었다.

정약용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약용이 성호 이익의 학풍과 조우한 시기는 그의 나이 16살 무렵인 1777년이었다. 그 해는 정조가 즉위한 지 1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성호 이익의 학문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사람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청나라 연경(燕京:북경)에 가서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다. 정약용의 매형이기도 한 이승훈은 다시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 온 정약용에게 이익의 종손(從孫)인 이가환을 소개해 주었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으로 당시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중심인물이었다. 이가환과 성호학파의 지식인 그룹을 통해 이익의 학문 세계를 접한 정약용은 비로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과 사회개혁에 대한 구상을 통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서양의 과학기술 및 신문명을 수용하는 열린 마인드를 갖추게 된다. 이가환과 성호학파 지식인들과 함께 토론하고 또 이익이 남긴 유고(遺稿)들을 공부하면서 정약용은 실학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스스럼없이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배우다)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고 말했다. 맹자가 공자를 사숙해 유학의 ‘아성(亞聖)’이 되었듯이 정약용은 성호 이익을 사숙하면서 ‘실학의 최고 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생(儒生)에 불과했던 정약용에게 실학의 정신과 방법으로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큰 꿈을 갖게 한 인물이 성호 이익이었다면, 그와 같은 큰 꿈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정약용을 가르치고 지원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정조대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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