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 미치고 돌에 미치고”…신분질서 벗어나 즐긴 취향과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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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에 미치고 돌에 미치고”…신분질서 벗어나 즐긴 취향과 기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10.13 0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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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⑥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⑥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는 17~18세 무렵 무릇 3년 동안이나 매화를 주조하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밀랍으로 만든 인조 매화를 창안한 다음 앞서 정약용이 ‘촛불 앞에 어린 국화 그림자’를 즐겼던 것처럼 “독서하는 등불에 비치는 그림자를 취하는 것”에서 큰 즐거움을 얻었다. 그리고 매화를 완물(玩物)하는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이렇게 읊었다.

“봄비가 처음 내리고 모든 새들의 울음소리기가 바뀌며 바위에 얼음이 녹고 붉은 이끼가 둥그렇게 무리질 때 그 틈에다 매화를 꽂고 울타리를 가를 맴돌면서 목을 늘이우고 멀리 바라보노라면 소담한 꽃송이가 외롭게 피어 있어 불현듯 임포(林逋)의 시상(詩想)이 일었다.

무릉씨(武陵氏: 이덕무)는 삼매경(三昧境)을 헤매다가도 매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퍼뜩 정신차려 화로를 끼고 앉는다. 밀랍을 본뜨고 털을 자를 때는 눈이 빛나고 손은 나는 듯 하였으며 동자(童子)를 마구잡이로 부렸다. 손님의 눈앞에 내놓고 자랑삼아 과장할 때는 큰일이나 되는 듯이 하지만 잠시 뒤에 경계가 바뀌고 일이 달라지면 마치 천한 흙인형을 버리듯 잊어버리니 만약 그에게 완물(玩物)하는 기롱을 한다면 어찌 참으로 무릉씨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영암(泠菴) 유득공이 나와 암실(暗室) 속에서 함께 자면서 말로만 그 법을 배워 어슴푸레 알았다가 뒤에 드디어 꽃을 만들어 묘경(妙境)까지 이르렀고 자기 문지방에 ‘납매관(蠟梅館)’이라 써 붙이려고까지 하였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윤회매십전’

또한 이른바 ‘매화벽(梅花癖)’이 있어서 매화나무 수십 그루를 심어놓고 신분 고하(高下)과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매화시(梅花詩)’를 구하러 다녀서 수천 편의 시를 얻은 까닭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매화시에 미쳤다”는 말을 들은 김석손이라는 인물을 소개한 글을 쓴 조희룡 역시 개인의 취향과 기호를 긍정하고 옹호하며 기꺼이 동참하려고 했다.

“김석손(金祏孫)은 자(字)가 백승(伯升)이다. 매화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어 매화 수십 그루를 심어 놓고 그 사이에서 휘파람을 불며 시를 읊조렸다. 한 시대의 뛰어난 시인들에게 매화시(梅花詩)를 구하였는데 여기에 응해 주는 이가 수천 명이 되었다. 무릇 시로서 이름이 난 이가 있음에 신분의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을 묻지 않고 그 문에 이르지 않음이 없었고, 그 모습이 항상 급하게 서두르는 듯이 보였다.

가로로 된 두루마리에 시를 적은 것이 황소의 허리보다 더 굵었으며 비단으로 꾸미고 옥으로 축(軸)을 만들어 집에 간직하였다. 사람들은 매화시에 미쳤다고 일컬었다. 그 빼어난 아취(雅趣)와 그윽한 운치는 범석호(范石湖: 범성대)가 매보(梅譜)를 만든 것과 고금(古今)에 정은 같지만 일을 좋아하는 것은 그보다 더하다고 하겠다.

호산거사는 말한다. ‘이생에서 이미 나부(羅浮), 동갱(銅坑), 등위(鄧尉), 현묘(玄墓) 등의 향설해(香雪海)를 가보지 못할진댄 차라리 손끝으로 갈무리하여 그윽한 회포를 풀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릇 나는 서화(書畵)를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곧장 붓을 휘둘러 거기에 응하여 하루 종일 게을리하는 뜻이 없었다. 이는 문여가(文與可: 문동)가 비단을 버선 재료로 삼으려고 한 행위처럼 하지 않고 완천리(阮千里 : 완첨)가 거문고 타는 것처럼 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백승(伯升)과 더불어 일은 다르지만 취향은 같은 것이다. 구천에서 함께 한번 웃음을 짓지 못함이 한스럽다.” 조희룡, 『호산외기』, ‘김석손전’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석치(石痴)’라는 자호를 썼던 북학파의 일원 정철조 또한 사대부의 위신과 체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독특한 재주, 곧 돌만 보면 갖고 다니는 조각칼로 벼루를 깎는 기이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존하던 사회에서 비루하고 천박한 짓으로 멸시당한 자신의 벼루 깎는 취미와 기술을 오히려 좋아하고 즐겼던 정철조는 ‘석치(石痴)’라는 자호를 쓸 만큼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대해 자부심이 남달랐다.

오로지 성현의 삶과 닮기를 원했던 이전 시대나 동시대의 양반 사대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철학의 소유자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그의 삶과 철학은 이규상이 지은 18세기 인물지인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죽석(竹石) 산수를 잘 그렸고 벼루를 새기는 데 벽이 있었다. 벼루를 새기는 사람은 으레 칼과 송곳을 갖추었는데, 이를 각도(刻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단지 패도(佩刀)만 가지고 벼루를 새기는데 마치 밀랍을 깎아내는 듯하였다. 돌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돌만 보면 문득 파서 잠깐 만에 완성하였다. 책상 가득히 벼루를 쌓아두었다가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주었다.” 이규상,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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