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⑤
[한정주=역사평론가] 윤기는 ‘좋은 사람 좋은 책 좋은 산수(好人好書好山水)’라는 글에서 도대체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관한 의문을 근본에서부터 파헤친 다음 “정말 좋은 사람을 알고 좋은 책을 알고 좋은 산수를 보는데 뜻을 둔다면 우리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책상 위의 책 그리고 눈과 발이 미치는 산수는 모두 이른바 좋다고 말할 만한 것이 아님이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좋은 사람을 알고 좋은 책을 다 읽고 좋은 산수를 다 본 사람은 ‘주자(朱子)’밖에 없다고 여겼지만, 이것은 오히려 안 것도 없고 읽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어 견문이 좁아 한 가지만이 옳다고 하는 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윤기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에는 좋지 않은 사람이 없고 좋은 않은 책은 없으며 좋지 않은 산수는 없기 때문에 오직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취했는가에 있을 따름이다”라고.
유학과 성리학적 사유와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개성적인 완상과 기호를 추구했던 시대의 철학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천하에 좋지 않은 사람은 없고 좋지 않은 책은 없으며 좋지 않은 산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취하는 방법이 어떠한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저 좋은 사람이 없다는 무호인(無好人)이라는 세 글자는 정말 학식이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좋은 책이나 좋은 산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 천하 후세 사람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 말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대개 그 근본을 소급하여 따져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품부 받았으니 이 성품은 본디 선한 법인지라 그 사이에 애초에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따로 있었던 적이 있었겠습니까? 오직 그 기질에 구애되고 물욕에 의하여 가려진 것인데, 그 말단을 살펴보면 어쩌다 가지런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 실질은 모두 좋은 사람입니다.
글자가 만들어진 이래 바로 이러한 책이 있었으니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팔색(八索)과 구구(九丘)에서부터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책에 이르기까지 어떤 책은 의리의 영역에 대하여 거듭하여 따졌고, 어떤 책은 치평의 계획을 연역하기도 하였으니 어떤 책이든 좋지 않은 것은 없지만 수천 년 사이에 오직 사람이 가지런하지 못함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왕왕 좋은 책과 배치되는 것이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산수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온 천지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모두 산과 물입니다. 두텁고 무거워서 옮길 수 없으니 나는 그것이 산인 줄 알고 두루 흘러 막힘이 없으니 나는 그것이 물인 줄 압니다. 비록 어쩌다 기상과 경계가 같지 않음이 있기는 하지만 요컨대 모두가 좋은 산수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은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긴다는 가르침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산과 물에 좋다는 호자를 붙인 적이 없었으니 그 즐길 만한 모습을 즐긴 것일 뿐입니다.
이를 가지고 본다면 사람은 절로 좋은 데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고 책은 절로 좋은 데도 읽지 않을 때가 많으며 산수는 절로 좋은 데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을 알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산수를 보는데 뜻을 둔다면 우리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책상 위의 책 그리고 눈과 발이 미치는 산수는 모두 이른바 좋다고 말할 만한 것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하필이면 특별한 사람을 알아야 하고 특별한 책을 읽어야 하며 특별한 산수를 본 다음에야 비로소 평소의 소원을 통쾌하게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더 따져보겠습니다. 좋다는 ‘호’ 한 글자를 붙여놓고도 그 마음이 이미 절로 좋아하지 않으니 또 어찌 능히 진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좋은 사람과 좋은 책과 좋은 산수라고 말을 해버렸다면 그 마음에 범상한 말과 범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온 천하가 함께 읽는 책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산수는 팽개치려 하고 구하는 것이 기괴한 물이나 괴벽한 문장, 세속과 단절된 빼어난 땅일 것입니다.
이는 비록 죽을 때까지 분주하게 다니면서 몸과 마음을 다하더라도 끝내 과부(夸父)가 해를 따라가려 한 우려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이런 좋은 것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또한 내가 이른바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니, 어찌 귀하게 여길 만하겠습니까?
저는 예전에 좋은 사람을 다 알고 좋은 책을 다 읽고 좋은 산수를 다 본 사람은 우리 주자(朱子) 선생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알고 지낸 사람으로는 장식(張栻)과 여조겸(呂祖謙), 황간(黃榦), 채원정(蔡元定) 등이었고 읽은 글은 시골 선비들과 함께 글자의 수나 따지면서 보던 읽지 못한 몇 권의 책이었으며 본 것은 봄날 한 번 오른 무이구곡(武夷九曲)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하였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군자가 원하는 바는 정말 기이함에 지나쳐서는 아니 되며 또 반드시 진짜 좋은 것을 기다린 다음에야 바야흐로 그 원할 만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진실로 어쩌다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속물로서 흥을 깨었다는 탄식이 나오게 하고 책을 읽었는데 비리해서 미워할 만하다는 말이 있게 되었으며 유람하며 완상을 하는데 노산(廬山)의 진면목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또한 도리어 안 적도 없고 읽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어 아무런 폐단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어찌 한 가지로 논단해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하되 책을 읽고 산수를 본 좋은 사람을 우리 시대에 한 번 만나 우아하게 토론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집사께서는 이를 가지고 질문을 하셨으니 집사께서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저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윤기, 『무명자집』 ‘좋은 사람 좋은 책 좋은 산수(好人好書好山水)’
예를 들어 ‘매화’에 대한 취향과 기호의 변화를 살펴보면 더욱 구체적으로 필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소개했던 군자나 사대부의 고상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글과는 다르게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과 기호 때문에 매화에 탐닉했던 지식인과 문인들의 글을 읽어보자.
먼저 ‘매화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매탕(槑宕)’이라는 자호(自號)까지 썼을 만큼 매화에 탐닉했던 이덕무의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이다.
“벌이 화정(花精)을 채취하여 꿀을 빚고 꿀에서 밀랍(蜜蠟)이 생기고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는데, 그것을 윤회매(輪回梅)라고 한다. 대체로 생화(生花)가 살아 있는 나무 위에 피었을 때 그것이 꿀과 밀랍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으며 꿀과 밀랍이 벌집 속에 있을 때 그것이 윤회매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렇기에 매화는 밀랍을 망각하고 밀랍은 꿀을 망각하고 꿀은 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매를 가지고 저 나무 위 꽃에다 대조해 보면 말 없는 가운데 따스한 윤기(倫氣)가 서로 통하여 그것이 마치 할아버지를 닮은 손자와 같다.
속장(俗匠)들이 종이를 오려서 만든 꽃도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천연스럽게 아담하고 조촐한 태도가 없어 때때로 여종이 부인(夫人)으로 꾸민 기상이 드러나고 만다. 윤회매도 가짜 꽃이지만 꽃다운 향기가 스며나와 필경 법외(法外)의 묘미가 있으니 진짜 매화를 만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윤회매를 만들 것이지 종이를 오린 매화를 만들지 말 것이다.
종이를 잘라 만든 매화가 수식(修飾)·변폭(邊幅 겉치레를 하는 것)을 한 소인(小人)이라면 윤회매는 환골탈태(換骨奪胎)한 도인(道人)이다.
윤회매가 매화로 되기 전에는 그것이 밀랍이지 꽃이 아니었지만 매화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밀랍의 전신(前身)이 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문장(文章)을 깨칠 수 있고 또 이치를 배우는 자가 연구한다면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법을 깨달을 것이다.
송(宋) 나라 사람이 ‘납매(蠟梅)가 원래 매화 종류는 아니지만 매화와 같은 때에 나오고 향기가 또 비슷한 데다 빛이 밀비(蜜脾 벌집)와 똑같기 때문에 ‘납매’라고 한다.’ 하였고,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은 ‘일종의 매화 종류가 있는데 여공(女工)이 밀랍을 손으로 빚어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였으며 《화경(花經)》에는 ‘납매의 원명은 황매(黃梅)로 소식(蘇軾)과 황정견이 이름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이 납매를 지금의 밀랍으로 만든 매화와 구별 없이 납매라고 한다면 황매와 혼동할 염려가 있어 억지로 이름을 윤회매라 하였던 것이다.
산곡이 말한 것을 보면 송나라 때 이미 밀랍으로 매화를 만드는 법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법은 알 수가 없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윤회매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