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주자성리학이라는 지식 권력에 맞서 독자적인 경전 해석과 저술로 스스로 주자의 권위를 넘어섰지만, 그 이유로 송시열 필두로 하는 노론 계열의 보수적·폐쇄적 주자성리학 일파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 주자성리학을 어지럽힌 도적)’으로 몰려 죽임까지 당했던 윤휴 역시 자신의 독특한 취향과 기호를 글로 남겨놓았다.
여기에서 윤휴는 홀로 지내면서 일찍 일어나 거동하고 책을 읽고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삶을 ‘사호(四好)’라고 일컬었다.
그 ‘사호(四好)’라는 것이 비록 유학자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하지만 동시에 이전 시대나 동시대의 주자성리학자(도학자)와는 다르게 그것을 단지 개인의 취향과 기호로 보는 남다른 사유의 흔적 역시 읽을 수 있다.
“나는 일찍부터 좋아하는 것이 네 가지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 이에 이 네 가지를 벗들과 어울려 함께 닦아 볼 생각으로 당(堂)의 이름을 ‘사호(四好)’라고 지었다. 여기에서 사호(四好)란 호독서(好讀書: 독서를 좋아함), 호정좌(好靜坐: 고요히 앉아 있음을 좋아함), 호조기거(好蚤起居: 일찍 일어나 거동함을 좋아함), 호독숙(好獨宿: 홀로 잠자기를 좋아함)이다.
이 네 가지에 대해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 길을 걷듯 마음속에 그리워하면서 비록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항상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내 뜻이다.
내 벗인 취규(就規)가 ‘사호(四好)란 어떤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 어떤 일을 좋아하게 되면 일삼게 되고 일삼게 되면 알게 되네. 그런데 나는 좋아하고 일삼으면서도 능숙하게 하지 못하고 있네. 어떻게 감히 말하기가 쉽겠는가. 만약 자네가 꼭 듣겠다고 한다면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물어서 자네의 뜻을 채우도록 하게. 나는 참으로 능숙하지 못한데 어찌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내 벗 취규는 나의 말을 써서 자신의 뜻으로 삼았다. 윤휴, 『백호전서(白湖全書)』 ‘사호당기(四好堂記)’
그런데 정약용에 오면 사물을 완상(琓賞)하는 관점 역시 군자나 사대부의 표상에서 벗어난 다분히 개인적 취향과 기호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먼저 정약용은 세상 사람들이 찬미하는 국화의 네 가지 아름다움이란 자신이 사랑하는 국화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국화 사랑, 즉 ‘촛불 앞에 어린 국화의 그림자’야말로 기이하기가 천하제일의 경치라고 말한다.
국화을 빌어 군자나 사대부의 고아(高雅)한 이미지를 담고자 했던 이전 시대 지식인과 문인들의 정신세계나 글쓰기와는 확연히 다른 국화 그 자체에 대한 개인적 탐미(眈美)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글이다.
“국화는 여러 꽃 가운데 유달리 뛰어난 4가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늦게 꽃피는 것이 하나이고, 오래도록 견뎌내는 것이 둘이고, 향기로운 것이 셋이고, 곱지만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싸늘하지 않은 것이 넷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해 이름을 얻고, 또 국화의 취향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 역시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네 가지 외에 또 다르게 국화를 사랑한다. 그것은 촛불 앞에 어린 국화의 그림자이다. 밤마다 꽃 그림자를 위해 담장 벽을 깨끗하게 쓸고 등잔불을 켠 다음 그 가운데 쓸쓸히 앉아 홀로 즐기곤 한다.
하루는 벗 윤구범에게 들러 ‘오늘 저녁에 내 집에 와 함께 자면서 국화를 구경하세’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무리 국화가 아름답다고 해도 어떻게 밤에 꽃구경을 하겠는가’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자꾸 사양하기에 나는 한번 구경이나 해 보라고 굳이 청해 함께 집으로 왔다.
저녁이 되자 일부러 심부름하는 동자(童子)를 시켜 촛불을 국화 꽃 한 송이에 가깝게 대어 보도록 했다. 그리고 윤구범을 이끌고 가 ‘꽃 그림자가 기이하지 않은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이해할 수 없군. 나는 하나도 기이한 줄 모르겠네’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난 한참 뒤에 다시 동자에게 평소 내가 한 방법대로 하도록 시켰다. 이에 방안의 어지럽고 들쭉날쭉한 옷걸이나 책상과 같은 물품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가지런하게 해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후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 불빛을 밝히도록 했다.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와 오묘한 형상이 홀연히 벽에 가득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우러지고 줄기와 잔가지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어 마치 묵으로 그린 한 폭의 국화꽃 그림을 펼쳐놓은 듯 했다. 또한 너울너울 어른어른 춤을 추듯 하늘거려 마치 달이 동녘에서 막 떠오를 때 마당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려있는 듯 했다.
그리고 먼 것은 제멋대로 흩어져 마치 가느다랗고 옅은 구름 혹은 노을과 같고 홀연히 사라지거나 소용돌이치는 모습은 마치 세차게 부딪치는 파도인 듯 했다. 문득 문득 번쩍거려 서로 엇비슷하니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 윤구범이 뛸 듯이 기뻐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고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이하다. 천하제일의 경치로구나’ 탄성과 흥분이 가라앉자 술을 마시고 서로 취해 시를 읊으며 즐거워했다.
그 자리에는 이유수·한치응·윤지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국화의 그림자를 읊은 시의 서문(菊影詩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