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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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 구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8.3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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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⑩
▲ 김홍도의 '마상청앵'.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⑩

[한정주=역사평론가] 참되고 올바른 식견과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의 상대성과 불완전성을 논증한 박지원의 ‘낭환집서(蜋丸集序)’를 읽다 보면 18세기 당시 지식인과 문인들이 ‘관조와 사이와 경계의 미학’을 얼마나 깊게 천착했는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서 박지원이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중간(中)’에 있다”고 말한 중에 나오는 ‘중간’은 ‘사이와 경계’의 미묘한 이치를-앞서 살펴본 박제가와는-또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자무(子務: 이덕무)와 자혜(子惠: 유득공)가 밖에 나가 노닐다가 비단옷을 입은 소경을 보았다. 자혜가 서글피 한숨지으며 ‘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구나’ 하자 자무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자와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함께 가서 물어보았더니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몰라’ 하였다.

옛날에 황희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蝨)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訟事)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蝨)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하였다.

백호(白湖) 임제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놈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으시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으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中)’을 알 수가 있겠는가.” 박지원, 『연암집』, ‘낭환집서(蜋丸集序)’

참되고 올바른 식견(識見)이란 정녕 천지 자연 및 우주 만물과 인간의 관점과 인식 사이의 중간 지점 즉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사물 및 대상과 작자 ‘사이와 경계’가 분리되고 통합되는 어느 지점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박지원조차도 그 ‘중간’과 ‘사이와 경계’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필자가 어떻게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 존재하는 중간과 사이와 경계의 지점은 결코 절대적이지도 고정불변하지도 않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이치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까닭에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는 극단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식견과 관점의 다양한 전환과 무궁한 변환만이 사물과 현상의 실재와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그것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묘사한 ‘광대의 줄타기’와 같은 것은 아닐까? 이쪽으로 기울어져도 떨어지고 저쪽으로 기울어져도 떨어지며,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면 다시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떨어지지 않고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떨어지지 않는 줄타기와 같이 이쪽과 저쪽의 경계와 왼쪽과 오른쪽의 사이(際) 즉 경계에 존재하는 어느 지점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줄타기의 종착점, 즉 실체와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그리고 광대는 다시 줄 위에 올라서야 하기 때문에 줄타기를 그만두거나 목숨이 끝날 때까지는 종착점은 종착점이 아닌 것처럼 실체와 진리 역시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지점에서부터 새로운 실체와 진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실체와 진리는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장의 경계는 겨우 한 겹을 벗겨내면 또 한 겹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마치 파를 벗기는 것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그 안에 무엇이 있는 것과 같고,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곳이자 실제로는 크게 진보할 곳이라고 말한 이학규의 글은 실체와 진리의 상대성과 불완전성을 문장론에 접목해 탁월하게 비유‧묘사한 명문 중의 명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가 말하기를 ‘문장의 경계를 살펴보면 항상 한 겹 비단으로 가려 있는 것 같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명언이군요. 문장에는 참으로 이러한 경계가 있으니 겨우 한 겹을 벗겨내면 또 한 겹으로 가려져 있지요. 마치 파를 벗기는 것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그 안에 무엇이 있는 것과 같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며 실제로는 장차 크게 진보할 곳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두보가 어떻게 해서 만년에 이르러 시작(詩作)이 더욱 정밀해졌겠습니까? 어찌하여 왕세정(王世貞)이 귀유광(歸有光)을 조문하는 글을 썼겠습니까?

문장은 하나의 작은 기예일 뿐입니다. 공자는 위대한 성인이었지요. 하지만 ‘나에게 몇 년을 빌려 주어 『주역(周易)』을 다 배우게 된다면 큰 과실이 없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실제로 공자가 위대한 성인이 된 까닭이 거기에 있답니다. 선종에서 면벽수도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대는 이러한 경계에 대해 한 겹을 뚫고 통과하고자 한다면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겹을 아예 없애고자 한다면 우리 유가의 도에서는 그러한 경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바로 그대가 자신의 한계를 그어놓고 더 이상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문장 짓는 것은 탕을 데움과 같지요. 따뜻하게 데웠다가 차가워지는 것도 탕이요, 차가워지면 따뜻하게 데우는 것도 탕입니다. 다만 차가워지는 것은 갈수록 차가워지고, 따뜻하게 데우는 것은 갈수록 따뜻해지는 법이지요. 이것이 또한 조금씩 나가는 것과 조금씩 물러나는 것의 차이입니다.” 이학규, ‘답모인(答某人)’

이렇게 본다면 마치-앞서 홍길주의 ‘오로원기’에서 보았듯이-‘앎’이란 안다는 것, 다시 안다는 것 밖의 모르는 것, 또 다시 안다는 것, 다시 안다는 것 밖의 모르는 것이 끝없이 돌고 도는 ‘영원회귀’인 것처럼 실재(實在)와 진상(眞像)을 인식하고 참된 식견(識見)을 얻는 일 또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할 수 있는 힘’과 ‘사이와 경계의 미묘한 이치’를 그나마 깨우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 아닐까?

그래서 문장의 경계 또한 경계가 없는 경계이므로 만약 스스로 그 경계에 도달했다고 하는 순간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그어놓고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이학규의 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비록 끝을 알 수 없지만 끝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관조와 사이와 경계’의 미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글쓰기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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