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⑯ “큰 부는 미래를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만 이룰 수 있다”
[한정주=역사평론가] 다른 사람이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더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은 부와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이자 덕목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석회암으로 뒤덮인 바위산에 불과했던 만달산에 과감하게 투자해 평양 제일의 여성 갑부가 된 백선행(白善行)은 바로 그러한 자질과 덕목을 갖춘 인물이었다.
백선행은 조선 말기인 1848년(헌종14년) 평양 박구리(礡九里: 중성동)에 살던 가난한 농민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버지 백지용은 백선행의 나이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는 과부인 어머니와 단 둘이 가난과 고독을 견디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백선행은 열네 살 때 평양 출신의 가난한 농민 안재욱과 혼인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인 열여섯 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후 자수성가해 평양을 대표할 만한 갑부(甲富)가 된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말년에 평생 어렵게 모은 재산과 토지를 각종 사회 활동과 장학 사업에 내놓은 배포 큰 여장부이기도 했다. ‘백선행’이라는 이름 역시 객사리라는 동네의 나무다리를 튼튼한 돌다리로 교체한 공적을 잊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것이다.
백선행은 60세 이전까지 모은 자신의 재산을 그후 26여년 동안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사회에 기부한 금액은 31만6000여원.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해도 3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특히 그녀는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등의 설립과 장학 사업에 18만원(180억원 상당의 금액)을 아무런 조건 없이 기부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얼마 전 평양 사립 광성보통학교에 1만3000원의 재산을 기부하여 여러 돈 있는 사람을 놀라게 했던 평양부 백선행 여사는 이번에 또다시 평양 장로교회가 경영하는 사립 숭현여학교에 현금 3만원 가치에 상당하는 대동군 추자도에 있는 전답 2만6000여평을 기부했다. 학교 당국에서는 물론이요 일반 사회에서는 백 여사의 열성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하다더라.” <‘백 여사 특지, 「동아일보」 1925년 10월26일자>
무일푼의 나이 어린 과부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평생 동안 모아온 수백억 원의 재산을 거리낌 없이 사회에 내어놓은 탓에 당시 평양 사람치고 그녀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1933년 백선행이 세상을 떠나자 15만 평양 시민은 그녀를 추모하는 사회장(社會葬)을 치러주었다.
당시 평양 시민 3분의 2가 참석한 이 장례식은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이라는 각별한 의미를 지녔는데 그만큼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남겨놓고 간 족적이 컸다.
과연 백선행은 누구 한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상황을 헤치고 어떻게 그토록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에 관한 해답을 찾아가다 보면 “작은 부는 근검절약으로 얻을 수 있지만 큰 부는 미래를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만 이룰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백선행이 당시 얼마나 비참하고 혹독한 생활환경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는 기사가 1933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있다.
“열여섯 살이 된 백 과부는 남편을 잃고 다시 과부 어머니를 찾아 친정으로 돌아왔다. 개가하여 팔자를 고치라는 동네 사람의 권유가 있었으나 스무 살 전의 과부는 세 번 남편을 갈지 않으면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미신이 주는 공포와 어머니 과부의 신세를 생각하여 과부 모녀는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기로 맹세하고 새 생활을 개척했다. 우선 그날그날 먹을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으로 새 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1’, 「동아일보」 1933년 5월10일자>
백선행이 재산을 모은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단계에서 그녀는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작은 부’를 얻을 수 있었다. 평양은 예부터 의주, 안주, 개성, 한양, 동래 등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상업 도시 역할을 했고, 그 때문에 어느 곳보다 상업 활동과 장시(場市)가 발달한 곳이었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몸이나 다름없었던 백선행은 평양의 상업적인 조건과 환경을 십분 활용했다.
먼저 그녀는 평양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자신의 집 앞뒤 마당에 봉선화를 심어 꽃을 따고 씨를 받아 5일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장터에 내다 팔았다. 또한 질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돌아다니면서 음식 찌꺼기를 얻어와 돼지를 길렀다.
그것도 모자라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치고, 목화씨를 발라 기름을 짜고, 물레와 베틀을 마련해 밤새도록 무명과 명주를 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장터에 나가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이렇게 해서 한 푼 두 푼 번 돈은 절대로 허투루 쓰지 않고 알뜰살뜰 모았다. 당시 그녀는 “먹기 싫은 음식을 먹고, 입기 싫은 옷을 입고, 하기 싫은 일을 한다”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백선행은 이렇게 10여년 동안 모은 돈으로 평양 주변의 땅을 사들였는데, 특히 흉년이 들거나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토지를 싼 값에 매입해 재산을 늘렸다. 그리고 사들인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다시 토지를 구입하는 데 사용하고 자신의 생활비는 예전처럼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해 벌어들인 돈으로 충당했다.
그때부터 백선행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녀가 이룬 부는 먹을 것, 입을 것, 하고 싶은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부지런하게 아끼며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룰 수 있는 작은 부였다고 할 수 있다.
정작 그녀가 다른 사람이 쉽게 이룰 수 없는 큰 부를 거머쥐게 된 이유는 미래를 헤아릴 줄 아는 통찰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통찰하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다.
그녀의 뛰어난 사업가적 안목과 자질은 만달산을 매입해 일본 굴지의 시멘트 회사 사장에게 몇 십 갑절의 이득을 남기고 매매한 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녀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바위산에 불과한 만달산을 사들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석회석이 많이 나는 땅을 찾아다닌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서울)을 돌아보고 온 다음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시멘트에 필요한 원료인 석회석이 대량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만달산이 그녀에게는 석회석이 풍부한 황금 산으로 보였다. 더욱이 만달산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거대한 바위산에 불과했기 때문에 백선행은 아주 헐값에 이 산을 사들일 수 있었다.
사실 백선행이 만달산을 매입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고민과 결단이 필요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행동을 무모하다고 여겨 산의 매입을 적극 만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익이 언제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위산을 구입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위험한 투자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백선행의 투자 판단과 과감한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녀가 예측한 대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시멘트 회사에서 만달산을 팔라고 통사정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백선행은 값이 오를 대로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못한 듯 이 산을 팔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한 건의 부동산 거래로 30만원(300억원 상당의 금액)의 자산을 소유한 평양 제일의 여성 갑부로 거듭났다.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백선행은 사기꾼에 속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황무지에 불과한 만달산을 구입했고, 당시 평양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녀가 이제 폭삭 망하게 되었다고 쑤군대며 조소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인이 나서 거액을 주고 만달산을 구입하는 바람에 불행이 행운이 되는 전화위복으로 일약 평양 제일의 갑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달산의 미래 가치를 내다 본 사업가적 통찰력에 따른 투자의 결과가 아니라 우연히 찾아온 행운 덕분에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볼 때 하루아침에 평양에서 손에 꼽는 벼락부자가 된 백선행은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신여성』이라는 잡지에서 백선행을 둘러싼 풍설을 취재해 기사로 실을 지경에 이르렀다.
“백 과부가 단돈 2전도 하지 못하는 황량한 박토를 어떤 흉악한 중개자에게 속아서 평당 7~8원을 주고 샀다는 소문은 당시 평양에서 일대 화제가 되었다. 백 과부가 밤낮으로 돈만 모으다가 망하게 생겼다고 조소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알았으랴.
그 후 한 2~3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시멘트 원료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모조리 평당 3~4원을 주고 매수했다. 백 과부에게도 물론 토지를 팔라고 매매 교섭을 했다. 총명한 백 과부는 그 말을 듣자 즉각적으로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리들보다 눈 밝은 일본사람들이 부리나케 들어와서 제발 토지를 팔라는 데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백 과부는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강한 자여! 그대는 여자니라’, 『신여성』 1933년 2월호>
그러나 평소 돈에 대한 속셈이 밝고 어렵게 살아온 까닭에 거래를 하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던 그녀의 태도로 볼 때 사기를 당해 만달산을 구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의 기사만 해도 꼼꼼히 읽어보면 앞에서는 백선행이 단돈 2전 밖에 안하는 황량한 박토(薄土)를 무려 350~400배에 달하는 평당 7~8원의 가격에 사들인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가 뒤에서는 토지를 사러 다니는 일본인들의 행동을 보고 무언가 연유가 있을 것임을 예측할 줄 아는 총명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백선행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일본인, 그것도 일본 최대 시멘트 회사의 사장을 상대해 토지 매수가인 평당 3~4원보다 20배가 넘는 평당 70원에 자신 소유의 땅을 팔 수 있었겠는가! 또한 만약 백선행이 총명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기꾼에게 속아 단돈 2전도 하지 않는 황량한 박토를 수 백 배가 넘는 평당 7~8원의 가격에 살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이러한 풍설(風說)은 여성의 능력과 자질을 낮게 평가한 당시의 사회 풍토가 만들어낸 소문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르게는 백선행의 성공 신화가 남성 중심의 사회에 던진 파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사회적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남성의 몸으로도 이루기 힘든 부와 성공을 일궈냈으니 세상 어떤 남자가 백선행의 성공을 쉽게 믿고 싶어 했겠는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보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부를 얻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루려면 남이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일본인들이 석회석이 많이 나는 땅을 찾는다거나 조선에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사실은 누구나 듣고 본 사회현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린 이 현상을 백선행은 사업 정보로 습득하고 미래의 사업 환경을 분석하는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이나 만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만달산을 사들이는 투자를 결행했다.
새로운 가치란 ‘남과 다르게 보고 생각한 다음 과감하게 행동하는’ 경영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몫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부와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백선행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투자 가치를 찾고, 일단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공격적으로 투자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