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밝은 것은 지극히 가깝고 드러나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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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밝은 것은 지극히 가깝고 드러나는 곳에 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5.2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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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③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③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진짜와 가짜, 실재와 허상, 사실과 거짓, 실체와 환상의 여부를 가늠할 수도 가릴 수도 없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실재와 사실과 진실과 진짜는 비록 알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깨우칠 수 있는 혜안(慧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혜안이란 쉽게 말해-‘아는 것’과 ‘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하는 안목(眼目)’을 말한다.

만약 안다는 것과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하는 안목이 없다면 글쓰기란 인간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담을 수 없고 자연과 만물의 참된 모습을 온전히 묘사하거나 그 참된 본성을 표현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혜안은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홍길주가 밝게 볼 수 있는 방법을 해석해놓은 ‘명해(明解)’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면서 그 해답의 단서를 찾아가보자.

“먼 곳까지 비추는 것을 밝다고 하니 가까운 데를 살피는 것만으로는 밝다고 하기에 부족하다. 미세한 것까지 비추는 것을 밝다고 하니 드러난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밝다고 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늘 크게 밝은 것은 지극히 가까운 데 있고 크게 밝은 것은 지극히 드러난 데 있다고 말한다. 지금 온갖 색을 열 걸음 안에 펼쳐 놓는다면 소경이 아니고서야 누가 못 보겠는가? 그러나 눈이 밝은 것은 이 정도면 그만이다. 반드시 백 리 밖에 있는 미세한 것까지 분별한 뒤라야 밝다고 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사람의 선악을 논하고 시비의 득실 따지기를 일삼아서 위 아래로 수천 년을 해를 보듯 훤히 안다. 그런데 같은 방에 있는 처첩과 자제들의 선악에 대해서는 혹 봉사처럼 알지 못한다.

크게는 넓은 세상과 억조창생의 일에 이르기까지 이해와 안위를 논할 때 극히 작은 것도 틀리지 않으면서 집안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앞에 두고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데도 그가 먼 곳을 볼 수 있다고 하여 밝다고 하겠는가?

지극히 은미한 천도와 지극히 그윽한 귀신, 지극히 심오한 성명(性命)과 이기(理氣)는 천백번이나 바꾸어도 하나도 막힘이 없어 종횡무진 문답하면서 의복과 음식, 궁실과 거마와 같은 늘 일용하는 사물에 대해서는 어두워 알지 못한다면 이것이 될 노릇인가? 그러므로 나는 또 은미한 것을 비춰 볼 수 있다 하여 감히 밝다고 하지 못하겠다.

아,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지내는 사람의 선악을 살피지 못하여 나라를 전복시키고 집안을 망하게 했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상하 수천 년 동안의 득실을 분별하지 못하여 패망에 이르렀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한 집안에서는 서로 정이 막힌 채 소통하지 못하면서 넓은 세계와 억조창생이 제자리를 얻게 하여 위험과 환란을 완화시켰다는 말도 나는 믿지 못하겠다.

화복의 기미는 늘 일용 사물 속에 잠복해 있다. 성명과 이기가 가정과 국가를 길하게 하거나 흉하게 한다는 도리는 천하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이제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가지고 밝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그저 멀리 비추고 은미한 것을 밝히기만 하면 비록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집안을 어지럽힐지라도 밝다고 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큰 밝음은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드러난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홍길주, ‘명해(明解)’

“제 눈썹 못 본다”는 속담이 있다. 세상 온갖 것을 다 알고 다른 사람의 일을 모두 꿰뚫고 있지만 정작 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눈썹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속담이다.

크게 밝다는 것은 지극히 가까운데 있고 지극히 드러나는 곳에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시간적으로는 수천 년, 공간적으로는 수만 리 떨어져 있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칠 수 있다.

홍길주의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하학상달(下學上達)’의 뜻, 즉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워서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달한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잘못된 지식과 경험에 갇혀 있다면 세상의 온갖 서적을 다 읽고 천하를 돌아다니는 수고를 한다고 해도 올바른 식견(識見)과 참된 이치를 깨우치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제 한 몸 눕히기에도 좁은 방에 앉아 있더라도 올바른 식견과 혜안을 갖추고 있다면 인간 세상과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우치기에 부족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성리학의 프리즘에 갇혀 인간 세상과 우주 만물을 본다면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독서하고 심지어 세계를 일주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와 계급 불평등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이자 성명(性命)과 이기(理氣)가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이치이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며 그 중심에는 중국이 자리하고 주변에 이적(夷狄: 오랑캐)이 있다는 세계지리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방안에 앉아 있더라도 학문의 방향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되면 신분 차별과 계급 불평등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닌 체제가 만든 잘못된 지식이자 견해라는 것을 깨우칠 수 있고 유학이나 성리학만이 학문이 아니라 그들이 잡학(雜學)이라고 업신여기는 일상생활에 유용하고 이로운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과 박물학(博物學)이 진정 세상에 필요한 학문임을 알게 되고 지구는 둥글고 회전한다는 지구설(地球說)과 자전설(自轉說)을 알고 나면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어떤 곳도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고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 바깥에도 거대한 문명을 갖춘 큰 세계(예를 들어 서양)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구태여 세상 온갖 서적을 다 뒤지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 다음에야 인간 세상과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홍길주는 바로 학문의 방향과 진리를 탐구하는 길을 제대로 찾아야 비로소 지극히 밝다는 것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과 길은 성리학과 같은 고담준론(高談峻論)과 형이상학(形而上學)에 갇혀 있는 것을 거부하고 일상에서 유용한 실학(實學)과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우는 하학(下學)을 바탕으로 삼아 인간 세상과 우주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하는 안목’이란 성리학적 시각과 화이론적 세계관의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보는 혜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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