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의 ‘근검절약론’ vs. 박제가의 ‘소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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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근검절약론’ vs. 박제가의 ‘소비론’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9.13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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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성호 이익⑤…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체제 꿈꾼 경제학자
▲ 이익은 ‘시장’을 사치와 낭비 그리고 백성의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는 온상으로, 화폐 유통을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근원으로 보았다. <그림=이서지의 풍속화 '장날'>

[조선의 경제학자들] 성호 이익⑤…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체제 꿈꾼 경제학자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익은 18세기 경제학자 중 상공업 발전과 화폐 유통을 가장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이상으로 삼았던 그의 시각으로 볼 때 상업의 활성화나 상품 화폐 및 시장 경제의 발달은 곧 농업 경제의 황폐화를 뜻했다.

“농민은 한 해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하다. 그런데 상업은 교묘해 상인은 하루만 애써도 닷새를 먹을 수 있다. 백성들이 나라의 근본인 농사를 싫어하고 상업을 숭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익, 『성호사설』 ‘선금말작(先禁末作)’

천하의 부와 재물은 모두 토지로부터 나온다고 여겼던 이익은 상인이 교묘한 상술로 하루 만에 벌어들인 닷새 치 식량 또한 농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업이란 부와 재물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로부터 강탈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익은 나라의 부강함과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농사를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그는 “백성이 농사에 힘쓰게 하는 일은 상업을 억제하는데 있다”고 단언했다.

또한 이익은 ‘시장’을 사치와 낭비 그리고 백성의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는 온상으로, 화폐 유통을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근원으로 보았다. 이에 그는 화폐 유통을 철폐하고 시장을 축소하는 한편 시장을 여는 날도 대폭 조정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익은 당시 매일같이 열리는 지방 시장은 백성들이 농사일을 멀리하고 게을리 놀며 시간이나 허비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면서 같은 날 시장을 열게 해 한 달에 6일 동안만 시장에 나오고 나머지 날은 농사에 전념하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관점은 물론 당시 실학자나 경제학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도 이익의 ‘상업관과 화폐관’은 분명 퇴행적인 측면이 있다.

화폐 유통을 철폐하고 상업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는 이익의 경제관은 분명 양대 전란 이후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던 조선의 사회·경제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시대 역행적인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모든 부와 재물이 토지로부터 나온다는 이익의 경제사상에서 볼 때 경제의 최고 덕목은 ‘근검과 절약’이었다. 그는 “농사를 지어서 재물을 모으고 검소함으로 재물을 절약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이 부유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사치와 낭비’야말로 경제의 최대 적(敵)이라고 주장했다.

이익은 사치와 낭비를 부추기는 근원은 다름 아닌 상업 활동과 화폐 유통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상업이 활발해지고 화폐가 범람하게 되면서 백성은 모두 이익에만 골몰해 농사를 버리고 상업에 매달리게 되고 또한 돈의 편리함에 빠져 화려한 복식과 사치스러운 물품을 구입하는데 온통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보았다.

즉 상업과 화폐 유통의 발달은 백성들의 사치와 낭비를 부추겨 부와 재물을 허투루 쓰게 해, 나라와 백성이 모두 가난해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익의 ‘근검절약론’은 박제가의 ‘소비론’과 정반대의 경제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박제가는 활발한 소비가 활력 넘치는 생산 활동을 불러온다면서 소비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는 조선은 오히려 근검절약 때문에 반드시 쇠퇴하게 될 것이라며 소비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재물을 우물에 비유해 퍼내면 퍼낼수록 가득하게 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말라버리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이상으로 삼은 이익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연 근검절약이 최고의 미덕일 수밖에 없다. 반면 상품 화폐 및 시장 경제의 활성화를 이상으로 삼은 박제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연 소비와 사치가 최고의 미덕이다.

이것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와 상품 화폐 및 시장 경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근대 자본주의의 우군(友軍)에 가까운 사람은 이익이라기보다는 박제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익은 생전은 물론 사후에까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예를 들면 유학의 이병휴, 천문과 문장의 이용휴, 예학의 이삼환, 실학의 이가환·윤동규, 인문지리의 이중환, 역사의 안정복, 서학의 권철신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유형원에서 시작해 이익 계보를 이은 중농주의와 토지 개혁의 경제사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익의 사후 그를 사숙한 정약용에 의해 계승·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이익의 학문 세계와 조우한 시기는 그의 나이 16살 무렵인 1777년이었다. 이익의 사후 14년이 지난 뒤였다.

정약용은 이때부터 이익의 제자들과 그가 남긴 여러 유고(遺稿)들을 통해 경세치용과 서양의 과학 기술 및 신문명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스스럼없이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토지 개혁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다듬을 때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경제사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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