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태종 등극 두 달 만에 역적으로 몰린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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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태종 등극 두 달 만에 역적으로 몰린 이유는?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4.0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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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두 달 뒤 정몽주와 정도전을 전혀 다르게 대접했다.

태종 9년 8월에 편찬이 시작돼 3년6개월 만에 끝난 『태조실록』에 실린 ‘정도전의 졸기’에는 그가 고려의 역사를 왜곡해 폄하하는 불충을 저질렀고 또한 조선의 왕실을 해치려다가 죽임을 당한 천하의 간적이자 역적으로 묘사돼 있다.

“정도전은 도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다. 또한 겁이 많아서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은 반드시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려고 했다. 이에 틈만 나면 태조에게 사람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라고 권고했지만 임금께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가 편찬·서술한 『고려국사(高麗國史)』를 보면 공민왕 이후로는 제멋대로 말을 덧붙이거나 삭제해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그르게 여겼다. …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 : 이방석)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왕실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태조실록』 7년(1398) 8월26일

‘실록’이라는 국가 차원의 공식 기록을 통해 정도전을 치욕과 불명예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에게는 정반대로 화려한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참찬의정부사 권근의 말을 좇아서 “고려의 문하시중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를 증직”한 것이다. 증직이란 공신이나 충신이 죽은 후 벼슬을 주거나 다시 높여주는 것인데 정몽주는 고려의 최고 관작인 문하시중이었으므로 역시 조선의 최고 관작인 영의정부사를 하사한다는 취지였다. 증직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대우를 한 셈이다.

왜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두 달 만에 한때 자신이 정적으로 삼은 인물에게 이토록 후한 대접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정몽주야말로 임금에게 끝까지 충절을 지킨 충신의 사표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정몽주는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이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아니 오히려 임금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정몽주의 충절과 의리는 이제 창업 단계를 지나 수성 단계로 접어든 조선이 신민들에게 적극 권장해야 할 아름다운 덕목이었다.

권근은 그 덕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정몽주를 부활시킨 태종의 진정한 뜻이기도 했다.

“오히려 섬기던 고려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개와 지조를 버리지 않아서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죽기를 각오하고 절개를 지키는 행동’이므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 정도전은 죽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왕의 권력과 권위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었다. 이미 죽고 사라져버린 정도전이 무슨 위협이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방원은 정도전이 남긴 ‘신권 정치’의 망령이 자신이 갈망한 강력한 왕권 국가를 침해하는 심각한 위협 요소라고 생각했다.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임금의 권력 행사를 축소하거나 제약하고 재상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신권 정치의 나라’였다. 이방원은 그러한 정도전의 신권 정치를 “신하들이 나라의 권세를 제멋대로 하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임금을 능멸하고 왕권을 농단하는 암적인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다.

따라서 왕권 국가 조선의 기틀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신권’이 다시는 싹트지 못하도록 제압해 놓아야 했다. 정도전이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역적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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