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로 조선의 개국을 진두지휘한 반면 정몽주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려다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개국 10년도 채 되지 않아 이들의 승리와 패배는 극적인 반전을 겪게 된다.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당시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은 역적의 굴레를 쓴 반면 정몽주는 태종 2년(1401년) 영의정부사를 증직받아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고려에 끝까지 충성하며 조선의 등장에 죽음으로 저항한 정몽주는 고려와 조선 모두에게 추앙받는 영웅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조선 건국의 최고 공신인 정도전은 고려와 조선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주인공으로 고종 2년(1865년) 복권돼 명예를 회복할 때까지 무려 467년 동안이나 역적으로 살아야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기는 1360년(공민왕 9년) 무렵이었다. 그때 정도전은 19세였고 정몽주는 24세였다.
당시 과거에 세 차례 연속 급제한 정몽주는 이미 고려 전역에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던 정도전에게 정몽주는 꿈속에서나 그려봄직한 동경의 대상 그 자체였다.
당시 정몽주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던 기쁨을 정도전은 일찍이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선생과 함께 얘기를 나누는데 평생의 친구처럼 나를 대하시고 가르침을 주셨다. 매일같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을 들어서 깨우칠 수 있었다.”
정도전은 불교가 융성하고 유교가 쇠퇴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유학의 앞날을 밝혀나갈 사람으로는 “나의 벗 달가(達可 : 정몽주의 자)가 참으로 그 적격자”라고 여길 만큼 정몽주를 존경하고 따랐다.
정도전에 대한 정몽주의 관심과 애정 역시 각별했다. 이색 문하의 후배 중 정도전만큼 유학에 열정을 쏟고 또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기본 틀을 세우는데 지침서의 역할을 한 『맹자』를 건네준 사람 역시 정몽주였다.정도전은 스무 살 때 진사시에 급제해 하급 관리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영주로 낙향 3년 상(喪)을 지내고 있었다. 이때 정몽주가 『맹자』를 보내주었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 반 장 이상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정독에 정독을 거듭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정도전은 민심과 왕도를 잃은 왕조는 혁명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역성혁명’의 사상을 배웠다.
정도전은 『맹자』를 탐독하는 과정에서 맹자가 말한 제왕의 권력과 권위의 궁극적 원천인 천명(天命 : 하늘의 뜻)이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민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옮겨 다닌다는 ‘천명개혁(天命改革)’ 사상을 보았다.
즉 민심을 잃은 왕조는 하늘의 뜻을 잃은 것이고, 하늘의 뜻을 잃어버린 왕조는 혁명을 일으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역성혁명에 죽음으로 저항한 정몽주가 오히려 정도전에게 역성혁명의 길을 안내해준 셈이니 역사의 흐름이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마음을 함께 하는 벗’이라고 부를 만큼 각별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개혁과 혁명의 갈림길에서 갈라서게 된다. 정몽주가 ‘고려 왕조를 개혁하자’는 온건 개혁파를 이끈 반면 정도전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유교 국가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는 급진 혁명파의 최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결국 각자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죽음을 맞았고, 정도전은 역성혁명에 성공했다.
이때만 해도 ‘패배자=정몽주, 승리자=정도전’의 등식은 영원히 변치 않을 법칙처럼 보였다. 그러나 채 10년도 되지 않아 이 등식은 정반대로 뒤바뀐다.
엇갈린 두 사람의 운명을 보고 있자면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에 대한 평가는 권력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