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버림받은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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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버림받은 혁명가”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3.0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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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위대한 패배자들···정도전①

▲ 삼봉 정도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할 때 최고의 승리자는 정도전이고 최대 비참한 패배자는 정몽주였다.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로 조선의 개국을 진두지휘한 반면 정몽주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려다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특히 정도전이 주창한 역성혁명과 유교 국가는 새로운 나라의 기본 이념이자 설계도 역할을 했다. 그는 ‘조선의 두뇌’였다.

그런데 조선이 개국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승리와 패배를 둘러싼 정도전과 정몽주의 운명은 극적인 반전을 겪게 된다.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때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은 역적의 굴레를 쓴 반면 정몽주는 태종 2년(1401년) 영의정부사를 증직 받아 화려하게 부활했기 때문이다.

고려에 끝까지 충성하며 조선의 등장에 죽음으로 저항한 정몽주가 고려와 조선 모두에게 추앙받는 영웅이 될 때 조선 건국의 최고 공신인 정도전은 고려와 조선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후 고종 2년(1865년)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할 때까지 정도전은 무려 467년 동안이나 역적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훗날 조선 건국을 둘러싸고 생사를 겨룬 정치적 적대자가 되었지만 본래 정도전과 정몽주는 고려 말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성리학을 공부한 동문 사이였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엇갈린 운명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기는 1360년(공민왕 9년) 무렵이었는데, 그때 정도전은 19세였고 정몽주는 24세였다. 정몽주가 5년 선배였던 셈이다.

당시 과거에 세 차례 연속 급제한 정몽주는 이미 고려 전역에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던 정도전에게 정몽주는 꿈속에서나 그려봄직한 동경의 대상 그 자체였다. 당시 정몽주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던 기쁨을 정도전은 일찍이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선생과 함께 얘기를 나누는데, 평생의 친구처럼 나를 대하시고 가르침을 주셨다. 매일같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을 들어서 깨우칠 수 있었다.”

정도전은 불교가 융성하고 유교가 쇠퇴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유학의 앞날을 밝혀나갈 사람으로는 “나의 벗 달가(達可 : 정몽주의 자)가 참으로 그 적격자”라고 여길 만큼 정몽주를 존경하고 따랐다.

정도전에 대한 정몽주의 관심과 애정 역시 각별했다. 이색 문하의 후배 중 정도전만큼 유학에 열정을 쏟고 또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기본 틀을 세우는데 지침서의 역할을 한 『맹자』를 건네준 사람 역시 정몽주였다.

정도전은 스무 살 때 진사시에 급제해 하급 관리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영주로 낙향 3년 상을 지내고 있었다. 이때 정몽주가 『맹자』를 보내주었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 반 장 이상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정독에 정독을 거듭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정도전은 민심과 왕도를 잃은 왕조는 혁명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역성혁명’의 사상을 배웠다.

정도전은 『맹자』를 탐독하는 과정에서 맹자가 말한 제왕의 권력과 권위의 궁극적 원천인 천명(天命 : 하늘의 뜻)이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민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옮겨 다닌다는 ‘천명개혁(天命改革)’ 사상을 보았다.

즉 민심을 잃은 왕조는 하늘의 뜻을 잃은 것이고, 하늘의 뜻을 잃어버린 왕조는 혁명을 일으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역성혁명에 죽음으로 저항한 정몽주가 오히려 정도전에게 역성혁명의 길을 안내해준 셈이니 역사의 흐름이란 참으로 알기가 어렵다.

여하튼 ‘마음을 함께 하는 벗’이라고 부를 만큼 각별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개혁과 혁명의 갈림길에서 갈라서게 된다. 정몽주가 ‘고려 왕조를 개혁하자’는 온건 개혁파를 이끈 반면 정도전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유교 국가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는 급진 혁명파의 최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결국 각자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죽음을 맞았고, 정도전은 역성혁명에 성공했다.

▲ 포은 정몽주
이때만 해도 ‘패배자=정몽주, 승리자=정도전’의 등식은 영원히 변치 않을 법칙처럼 보였다. 그러나 채 10년도 되지 않아 이 등식은 정반대로 뒤바뀐다.

이처럼 엇갈린 두 사람의 운명을 보고 있자면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에 대한 평가는 권력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태종 이방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태종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다음 정몽주와 정도전을 전혀 다르게 대접했다.

태종 9년 8월에 편찬이 시작되어 3년6개월 만에 끝난 『태조실록』에 실린 ‘정도전의 졸기’에는 그가 고려의 역사를 왜곡해 폄하하는 불충을 저질렀고 또한 조선의 왕실을 해치려다가 죽임을 당한 천하의 간적이자 역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도전은 도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다. 또한 겁이 많아서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은 반드시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려고 했다. 이에 틈만 나면 태조에게 사람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라고 권고했지만 임금께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가 편찬·서술한 『고려국사(高麗國史)』를 보면 공민왕 이후로는 제멋대로 말을 덧붙이거나 삭제해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그르게 여겼다. …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 : 이방석)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왕실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태조실록』 7년(1398) 8월26일

이렇듯 ‘실록’이라는 국가 차원의 공식 기록을 통해 정도전을 치욕과 불명예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에게는 정반대로 화려한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참찬의정부사 권근의 말을 좇아서 “고려의 문하시중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를 증직”한 것이다. 증직이란 공신이나 충신이 죽은 후 벼슬을 주거나 다시 높여주는 것인데 정몽주는 고려의 최고 관작인 문하시중이었으므로 역시 조선의 최고 관작인 영의정부사를 하사한다는 취지였다. 증직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대우를 한 셈이다.

왜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두 달 만에 한때 자신이 정적으로 삼은 인물에게 이토록 후한 대접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정몽주야말로 임금에게 끝까지 충절을 지킨 충신의 사표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정몽주는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이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아니 오히려 임금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정몽주의 충절과 의리는 이제 창업 단계를 지나 수성 단계로 접어든 조선이 신민들에게 적극 권장해야 할 아름다운 덕목이었다.

권근은 그 덕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정몽주를 부활시킨 태종의 진정한 뜻이기도 했다.

“오히려 섬기던 고려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개와 지조를 버리지 않아서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죽기를 각오하고 절개를 지키는 행동’이므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 정도전은 죽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왕의 권력과 권위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었다. 이미 죽고 사라져버린 정도전이 무슨 위협이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방원은 정도전이 남긴 ‘신권 정치’의 망령이 자신이 갈망한 강력한 왕권 국가를 침해하는 심각한 위협 요소라고 생각했다.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임금의 권력 행사를 축소하거나 제약하고 재상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신권 정치의 나라’였다. 이방원은 그러한 정도전의 신권 정치를 “신하들이 나라의 권세를 제멋대로 하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임금을 능멸하고 왕권을 농단하는 암적인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다.

따라서 왕권 국가 조선의 기틀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신권’이 다시는 싹트지 못하도록 제압해 놓아야 했다. 정도전이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역적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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