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변화…신화와 설화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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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변화…신화와 설화의 변신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11.2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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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⑱ 일연 『삼국유사』…민중, 욕망하는 삶의 세계Ⅱ
지난 2018년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복원한 경주 사천왕사지의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壁塼) 3점.
지난 2018년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복원한 경주 사천왕사지의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壁塼) 3점.

[한정주=고전연구가]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그리고 천사옥대가 삼국통일 이전 신라 민중의 욕망과 갈망이 만들어낸 불교 신화(혹은 설화)라면 사천왕사와 만파식적은 삼국통일 이후 변화한 신라 민중의 욕망과 갈망이 만들어낸 불교 신화(혹은 설화)이다.

신라는 문무왕 때 당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인 이유는 신라 주도로 삼국통일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나라는 백제가 멸망한 후 그 땅에 웅진도독부를 세웠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신라의 영토가 아니라 당나라가 다스리는 땅이 된 것이다.

더욱이 당나라는 신라까지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고 획책했다. 결국 문무왕은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문무왕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당나라 고종은 이때 50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당시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의상대사는 옥에 갇혀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에게 고종의 전쟁 계획을 듣게 된다. 급히 귀국길에 오른 의상대사는 문무왕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에 봉착한 문무왕은 급히 신하들을 불러 모아 당나라 군대를 막을 대책을 의논했다. 통일신라시대 내내 국가 차원에서는 호국(護國), 민중의 입장에서는 안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사천왕사(四天王寺)’ 창건 설화는 이때 만들어진다.

문무왕의 부름을 받아 급히 모인 신하들 중 각간 김천존이 명랑법사가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았다면서 그에게 대책을 물어보자고 건의했다. 문무왕은 조서로 명랑법사에게 물어보았다.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는데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당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때 사자가 달려와 수많은 당나라 군사들이 국경에 이르러 바닷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다급한 소식을 전달했다. 초조한 마음에 문무왕은 급히 명랑법사를 불러 다시 대책을 물었다. 『삼국유사』에는 이때 명랑법사가 밀교(密敎)의 은밀한 비법을 써서 당나라를 물리친 설화가 이렇게 기록돼 있다.

“명랑법사가 아뢰었다. ‘곱게 물들인 비단으로 임시 절을 만들면 됩니다.’ 이에 곱게 물들인 비단으로 절을 짓고 다시 풀로 다섯 방위를 맡은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종의 명승(明僧) 열두 명에게 명랑법사를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의 은밀한 비법을 쓰도록 했다. 이때는 당나라 군대가 신라 군대와 전쟁을 하기 전이었는데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일어 당나라 군대의 배가 모두 침몰되었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고 했으며 지금까지도 단석(壇席)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후 신미년(671년)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을 장수로 삼아 5만명의 군사를 보내 정벌하도록 했는데 또 그 비법을 썼더니 이전처럼 배가 침몰했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기이 제2」 ‘문무왕 법민’, 2008, p137)

‘사천왕사’ 설화와 더불어 삼국통일 이후 호국과 안전을 갈망하는 신라 민중의 욕망이 만든 대표적인 설화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 때 등장한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이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를 지은 다음해 바다를 관장하는 관리가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 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갔다”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상하게 여긴 신문왕은 일관(日官)을 불러 점을 치도록 했다. 일관은 동해의 큰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신라를 지킬 보배를 내리려고 하는 조짐이라고 아뢰었다. 그러면서 바닷가로 나가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신문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은 다음 배를 타고 그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신문왕은 용을 만났다. 용은 검은 옥대를 가져다 바치면서 “왕께서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놀라고 기쁜 마음에 신문왕은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 왕이 바다에서 나오자 신이하게도 그 섬과 용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궁궐로 돌아온 신문왕은 가져온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이 만든 이 피리의 영험한 효력과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이것을 귀하게 여겼는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기이 제2」 ‘만파식적’, 2008, p147)

‘만파식적(萬波息笛)’은 글자 뜻 그대로 ‘만 가지 파도, 즉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잠재우는 피리’이다.

식욕·수면욕·성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가 ‘안전 욕망’이다. 그것은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고 싶은 욕망, 질병으로부터 안전하고 싶은 욕망, 가뭄과 장마로부터 안전하고 싶은 욕망, 태풍과 거친 파도로부터 안전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런 점에서 세상 모든 재앙으로부터 안전하고 싶은 민중의 욕망이 만든 설화가 바로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잠재우는 피리 즉 ‘만파식적’ 이야기라고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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