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뒤에 숨은 스포츠의 재앙…“민중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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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뒤에 숨은 스포츠의 재앙…“민중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스포츠”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09.24 0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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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제공>
엿새째로 접어든 인천아시안게임은 각국 선수들의 메달 경쟁으로 열기가 한층 고조되고 있다. TV에 고정된 수많이 이들의 시선도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쫓으며 더러는 환호하고, 더러는 실망한다.

지난 2월 동계올림픽과 6월 월드컵에 이어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대규모 스포츠 행사가 TV 속으로 대중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스포츠는 지구상 유일한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위압감을 주는 경기장으로 거대한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모세혈관처럼 연결된 스크린을 통해 대중들의 시선을 강박적으로 낚아챈 뒤 저항할 수 없는 황홀경으로 무장 해제시킨다.

스포츠맨십이라는 그럴듯한 수사로 포장된 낯 뜨거운 해설은 오직 경쟁에서의 승리만이 인정받는 선수들을 포장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대중들을 흡입한다.

그러나 대중이 스포츠에 빠져 있는 동안 경기장 밖에서는 갖은 탐욕의 시스템들이 쉴 새 없이 작동한다.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한 무자비한 도시철거와 주민퇴거, 약물복용을 통한 선수들의 인조인간화, 그렇게 완성된 신체를 향한 포르노그래피적인 소비, 이 모든 것에서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국제스포츠기구와 국가기구들의 탐욕이 그것이다.

▲ 2014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제공>
프랑스 파리10대학에서 건축학과 미학을 가르치고 있는 마르크 페렐망(Marc Perelman)의 『야만의 스포츠』(삼화)는 국제 스포츠 행사들을 분석하며 스포츠가 어떻게 오늘날 대중의 일상과 시선을 조작하고, 그로부터 광신적 애국주의, 인종혐오,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 적에 대한 증오를 체화하는지 가차 없이 폭로한다.

집단적인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대중스포츠를 분석하며 그것이 신체, 성(性), 시선, 시공간, 네트워크, 정치, 국가, 자본에 개입하고 뿌리내리는 방식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개념을 토대로 파헤친다.

스포츠는 무엇보다 시각을 장악한다. 관중들은 경기장에서 선수들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정돼 있는 자리에서 거리감을 지닌 채 조명과 경기장 내 스크린을 매개해서만 눈앞의 사물을 볼 수 있다.

무엇이 실재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는 것은 사실상 스포츠에서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눈앞에 현시되고 있는 것만이 스포츠의 유일한 질문이다.

현실을 묻지 않는 구조의 반복,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FIFA·IOC 같은 스포츠 기관과 국가기구의 의도에 따른 지배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포츠는 관중들만이 아닌 스포츠 선수들의 몸 역시 지배한다. 약물사용을 스포츠 외부에서는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스포츠 선수 개개인의 일탈이나 순간의 실수에 있지도, 거대한 다국적 제약 산업의 이윤추구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바로 스포츠 자체가 원하는 선수와 육체를 만들어내는 수단, 그것이 약물인 것이다.

실제로 스포츠 선수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며, 언제나 스포츠가 요구하는, 관중이 열광하는 그 신체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약물은 사실상 스포츠와 불가분적인 요소인 것이다.

결코 지치지 않는 강철 같은 그들의 근육과 초인적으로 낚아채고 뿌리며 포효하는 그들의 몸짓은 인간육체의 자연적 가능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때문에 조만간 갈채를 받는 AGM(유전자변형 선수)을 경기장에서 보게 될 날도 머지 않았을 수 있다.

여기서 경쟁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다. 만약 스포츠에서 기록갱신과 승부를 금지시킨다면 스포츠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의 신체를 1초 단위로도 모자라 1/100단위로 조각조각 나누고 등급화 하는, 100년 동안 이어진 끊임없는 위계적 작업의 축적 체제가 바로 스포츠다. 이 등급이 상징하는 경쟁에서의 탈락은 스포츠 선수에게 있어 곧 죽음과도 같다.

몸값은 내 몸과 내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자 나의 가치다. 스포츠만큼 ‘자본이 장악한 노동력 상품’에 대해 이토록 솔직하고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산업이 있을까?

또한 스포츠는 시공간을 조직한다. 월드컵·하계올림픽·동계올림픽·유럽축구선수권(EURO)· WBC(야구월드컵)·아시안게임 외에도 프로야구·K리그·메이저리그·프리미어리그·챔피언스리그·국내 프로배구·농구 등등 수많은 스포츠 행사들이 시간을 교차하며 벌어지고 있다.

▲ 2014 인천아시안게임 수영경기장.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제공>
스포츠는 멈추지 않는 기관차, 자가증식하는 자본과 흡사하다. 자본이 시공간을 장악하고 그것을 자본의 방식대로 구현하듯 스포츠 역시 시공간을 스포츠적으로 구현한다.

스포츠는 자신이 행해질 시공간을 일순간 자본주의의 흐름을 상징하고 구현할 최첨단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다층적이고 불연속적인 역사의 층과 그곳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거주민들의 관계들을 표상하는 공간은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신격화된 선수들과 대중들이 쏟아내고 거두어들이는 열광과 저주 그리고 물밀듯 밀려오는 전 세계 이목과 화폐가 어떠한 방해 없이 흡수되고 흘러가며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된다.

기상천외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경기장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대로가 뚫리고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들과 24시간 내내 불을 밝히는 광고판들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보루가 그대로 재현된다.

스포츠는 또한 국가적 도구를 넘어 국가에 개입하고 국가를 조직해왔다. 저자는 히틀러가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의 리허설로도 평가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억한다.

전쟁의 도화선이 된 1969년 온두라스·엘살바도르 축구경기,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이른바 ‘청소’를 단행한 1968년 멕시코 올림픽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자국의 소수민족과 인권에 대한 탄압을 오히려 정당화시켜 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민주주의를 외치는 중동의 민중들에 포탄을 쏘아댄 독재국가와 올림픽에 참여하는 바로 그 독재국가는 별개의 차원이라던 2012년 런던 올림픽 등 현실 사회주의국가부터 서구자본주의국가까지, 독재국가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국가까지 어느 체제와도 동화되어 스포츠는 수도 없이 벌어진 카니발과 불가분적 관계를 맺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스포츠는 세계화하는 자본주의도 조직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스포츠가 자본주의의 고전적 장소이자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현실화시킨 영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규범들, 즉 성과지향,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정신,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과 그로부터 얻어진다는 효율성, 자기계발과 자조의 구현체를 스포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독점적인 금융자본주의에 종속된 수많은 옛 생산방식과 그 규범들, 즉 단 하나의 승자를 위해 존재하는 항구적인 대규모 예비실업자,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공수되어오는 농노제적 선수 수입, 노예적 무보수 노동도 스포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영상 및 정보매체, 관광, 미디어 등 각종 산업분야와 연동되어 스포츠는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이 책은 무심코 즐기고 흥분하고 열정을 쏟아냈던 스포츠를 전혀 다른 의미로 분석한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했던 마르크스의 말을 빌어 마르크 페렐망은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종교는 현실에 맞서 저항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는 아니다. 스포츠는 아무것도 못한다. 아니 오히려 가장 비참한 현실을 점점 확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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