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①입신양명 뜻 버린 17세기 최고의 재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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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①입신양명 뜻 버린 17세기 최고의 재야 지식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6.08 0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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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 개척한 대 사상가
▲ 이양원 동덕여대 교수가 그린 반계 유형원의 영정.

[조선의 경제학자들]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 개척한 대 사상가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 후기 체제의 개혁을 부르짖고 문화 르네상스를 주도한 실학파의 전성기가 18세기라고 한다면 이전 17세기는 실학의 융성을 준비한 개화기였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의 실학자들은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주류 성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학문과 현실 개혁 이론을 개척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익,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등 18세기 실학운동을 이끈 사상가들의 선배이자 스승 역할을 한 ‘실학의 제1세대’라고 할 수 있다.

1614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세상에 내놓아 ‘실학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 지봉 이수광(1563~1628), 대동법을 주창한 잠곡 김육(1580~1658), 『동사(東史)』를 저술해 중화주의(中華主義) 역사관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역사의식을 제창한 미수 허목(1595~1682), 토지 및 체제 개혁에 대한 광범위한 견해를 담고 있는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 유형원(1622~1673), 주자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변록(思辨錄)』과 농촌생활에 바탕을 둔 박물학서인 『색경(穡經)』의 저자 서계 박세당(1629~1703) 등은 ‘실학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특히 이들 중 유형원은 17세기 조선 재야 지식계의 거물로 이익과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파와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토대를 개척한 대(大)사상가다.

유형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1622년(광해군 1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을 뒤흔든 양대 전란의 한복판에 자리한 그의 출생은 이미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하고 있었다.

유형원이 태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그의 아버지 유흠은 ‘유몽인(『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의 옥사(獄事)’에 연루돼 감옥에서 자결하고 만다.

두 살 때 고아가 된 유형원은 그후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학문을 익혔다. 이원진은 훗날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남인 실학파의 산실 역할을 한 성호 이익의 당숙이고, 김세렴은 중국 실정에 밝고 일본에도 사신으로 내왕한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의 영향 덕에 유형원은 어려서부터 유학의 경전과 제자백가서는 물론 역사, 지리, 병법, 법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깊은 식견을 갖출 수 있었다.

유형원은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14세 때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원주→양평→여주 등지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양대 전란 이후 불어 닥친 조선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평생 진사(進士) 이상의 지위를 누리지 않았다. 진사라는 타이틀조차도 자신의 입신양명을 간절히 바라는 할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못해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해 마지못해 얻었을 뿐이다.

진사가 된 다음에는 출사(出仕)와 입신양명의 뜻을 완전히 접고 전북 부안에 위치한 우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서적 1만여권을 쌓아 놓고 당시 조선 사회를 구제할 혁신적인 방법과 체제 개혁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이, 유성룡, 조헌, 이수광, 한백겸, 김육 등 자신보다 이전 시대에 정치·사회개혁을 주창한 대학자들의 견해를 상세하게 살폈다. 그의 나이 32세 때부터 시작된 이 연구는 1670년 그의 나이 49세 때 『반계수록』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렇듯 유형원은 평생을 초야에 묻힌 채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깊은 학문과 세상을 보는 탁월한 식견에 관한 명성은 당시 중앙 정계의 거물 정치인들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의 영수(領袖)로 영의정까지 지낸 미수 허목은 유형원을 두고 임금을 보좌해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재상의 재목이라면서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이 같은 인물이 있는 줄 몰랐다”고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유형원이 44세 되던 해(현종 6년)에는 조정의 정승들이 합의해 그를 벼슬자리에 추천한 일이 있었다. 그때 유형원은 “내가 재상들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재상들이 나를 안다고 하겠느냐?”면서 출사를 거절했다.

이처럼 유형원은 비록 몸은 시골 한 구석에 거처하고 있었지만 명성은 이미 조선팔도를 뒤흔든 당대 최고의 재야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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