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이던 상태로 나를 돌려다오”…외안(外眼)이 도리어 내안(內眼)을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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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이던 상태로 나를 돌려다오”…외안(外眼)이 도리어 내안(內眼)을 해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9.08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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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③ 동심(童心)’의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제 다시 조선의 문장으로 눈을 돌려 이탁오의 ‘동심설’과 유사한 논리와 철학을 담고 있는 글을 꼽자면 혜환 이용휴의 ‘환아잠(還我箴)’과 ‘정재중에게 주다(贈鄭在中)’라는 두 편의 글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환아잠’에서 이용휴는-견문(見聞)과 도리(道理)가 들어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게 되면 어느덧 동심도 사라지고 만다고 한 이탁오와 비슷한 맥락에서-처음 태어날 때는 천리(天理)를 따르던 자신이 지각(知覺)이 생기면서부터 오히려 자신을 해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처음 태어난 그 옛날에는 / 천리(天理)를 순수하게 따르던 내가 / 지각(知覺)이 생기면서부터는 / 해치는 것이 분분히 일어났다 / 지식과 견문이 나를 해치고 / 재주와 능력이 나를 해쳤으나 / 타성에 젖고 세상사에 닳고 닳아 / 나를 얽어맨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성공한 사람을 받들어 / 어른이니 귀인이니 모시며 / 그들을 끌어대고 이용하여 / 어리석은 자를 놀라게도 했다 / 옛날의 나를 잃게 되자 / 진실한 나도 숨어버렸다 /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 돌아가지 않는 나의 틈새를 노렸다 / 오래 떠나 있자 돌아갈 마음 생기니 / 잠에서 깨면 해가 뜨는 것과 같았다 / 훌쩍 몸을 돌이켜 보니 / 나는 벌써 옛집에 돌아와 있다 / 보이는 광경은 전과 다를 바 없지만 / 몸의 기운은 맑고 평화롭다 / 차꼬를 벗고 형틀에서 풀려나 / 오늘에는 살아난 느낌이구나! / 눈이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 귀가 더 잘 들리지도 않으며 / 하늘에서 받은 눈과 귀의 밝음이 / 옛날과 같아졌을 뿐이다 / 수많은 성인(聖人)은 지나가는 그림자니 / 나는 내게로 돌아가리라 / 적자(赤子)와 대인(大人)이란 / 그 마음이 본래 하나다 / 돌아와도 신기한 것 전혀 없어 / 다른 생각이 일어나기 쉽겠지마는 / 만약 다시 여기를 떠난다면 / 영원토록 돌아올 길 없으리 / 분향하고 머리 조아리며 / 신에게 하늘에게 맹세하노라 / ‘이 한 몸 다 마치도록 나 자신과 더불어 살겠노라’ 라고.” 이용휴, ‘나를 돌려달라는 잠언(還我箴)’ (이용휴‧이가환 지음, 안대회 옮김,『나를 돌려다오』, 태학사, 2003. 에서 인용)

또한 ‘정재중에게 주다(贈鄭在中)’라는 글에서는 외부를 보는 눈, 즉 외안(外眼)이 도리어 내부를 보는 눈, 곧 내안(內眼)을 해치는 경우를 ‘장님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외물, 곧 견문과 지식 혹은 명예와 출세에 현혹되어 동심(童心), 곧 천진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최초의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경우와 절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부를 보는 눈(外眼)이요, 다른 하나는 내부를 보는 눈(內眼)이다. 외부를 보는 눈으로는 외부의 사물을 살피고, 내부를 보는 눈으로는 이치를 살핀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고 간에 이치가 없는 것이 없고, 외부를 보는 눈에 의하여 현혹된 자는 반드시 내부를 보는 눈에 의하여 바로잡혀야 하므로 눈의 기능은 온전하게 내부를 보는 눈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외부를 보는 눈이 도리어 내부를 보는 눈에 해를 끼친다. 옛날 사람이 ‘장님이던 처음 상태로 나를 돌려다오’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재중(在中)은 올해 나이 사십이다. 사십 년 세월 속에서 눈으로 본 것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부터 시작하여 팔십 노인에 이른다 해도 예전에 본 것과 다르지 않을 터이니, 뒷날의 재중이 현재의 재중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재중은 외부를 보는 눈에 장애가 생겨 사물을 보는 데 방해를 받아 오로지 내부를 보는 능력만을 얻었으므로 이치를 더욱 훤하게 터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뒷날의 재중은 오늘날의 재중과는 기필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동자의 백태를 없애는 처방은 말할 것도 없고 금비(金篦)로 각막을 깎아 눈을 뜨게 만드는 의술조차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용휴, ‘정재중에게 주다(贈鄭在中)’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상』,「혜환잡저 7」, 소명출판, 2007. 에서 인용)

그런데 흥미롭게도 필자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을 박지원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에 실려 있는 ‘답창애(答蒼厓)’와 청나라 여행 기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수록되어 있는 ‘환희기후지(幻戱記後識)’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창애에게 답하다(答蒼厓)’라는 제목을 단 글은 16세기 조선의 대학자 화담 서경덕과 장님에 얽힌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본분으로 돌아가 이를 지키는 것이 어찌 문장에 관한 일뿐이리오. 일체 오만 가지 것이 모두 다 그러하다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밖에 나갔다가 제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우는 자를 만나서 ‘너는 어찌 우느냐?’ 했더니 대답이 ‘저는 다섯 살 적에 장님이 되었는데, 그런지 지금 20년이 되었습니다. 아침나절에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천지 만물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밭둑에 갈림길이 많고 대문들이 서로 같아서 제집을 구분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 하기에 선생이 ‘내가 너에게 돌아갈 방도를 가르쳐 주마. 네 눈을 도로 감으면 바로 네 집이 나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장님이 눈을 감고 지팡이로 더듬으며 밭길 가는 대로 걸어가니 서슴없이 제집을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눈 뜬 장님이 길을 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색상(色相)이 뒤바뀌고 희비(喜悲)의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망령된 생각(妄想)이라 하는 거지요. 지팡이로 더듬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분수를 지키는 전제(詮諦)요, 제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이 되는 것이오.” 박지원,『연암집』, ‘창애에게 답하다(答蒼厓)’ (박지원 지음, 신호열‧김명호 옮김,『연암집 중』, 돌베개, 2007. 에서 인용)

‘환희기후지’는 글자 뜻 그대로 박지원이 청나라 여행 도중 열하의 길거리에서 요술을 보고 나서 지은 ‘환희기(幻戱記)’에다가 다시 조선으로 귀국한 다음 덧붙여 쓴 후기(後記) 성격의 글이다. ‘환희기’에서 미처 못 다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후기를 쓸 정도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글을 읽어보면서 찾아보자.

“이날 홍려시 소경(장님) 조광련이 의자를 나란히 하고서 요술을 구경하였다. 내가 조광련에게 말하였다. ‘눈이 능히 시비를 판단치 못하고 진위를 살피지 못할진대 비록 눈이 없다고 해도 괜찮으리이다. 그러나 항상 요술하는 자에게 속게 되는 것은 이 눈이 일찍이 망령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분명하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그려.’

조광련이 말했다. ‘비록 요술을 잘하는 이가 있다 해도 소경(장님)은 속이기가 어려울 터이니 눈이란 과연 향상된 것일까요(올바른 진실을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에 서화담 선생이란 이가 있었지요.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에 사십 년이올시다. 전일에 길을 갈 때는 발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간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냄새를 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 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부치었습지요.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으되, 저에게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눈 아님이 없었습니다. 또한 어찌 다만 손과 발, 코와 귀뿐이겠습니까? 날이 이르고 늦은 것은 낮에 피곤함을 가지고 보았고, 물건의 모습과 빛깔은 밤에 꿈으로 보았지요. 장애될 것이 없어 일찍이 의심스럽거나 어지럽지 않았습지요. 이제 길을 가는 도중에 두 눈이 갑자기 맑아지고 백태가 끼었던 눈이 저절로 열리고 보니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이어 만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아서 손과 발, 코와 귀가 뒤죽박죽이 되어 착각을 일으켜 온통 예전의 일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마득히(까마득히) 집을 잃어 스스로 돌아갈 길이 없는지라,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네가 네 지팡이에게 물어본다면 지팡이가 응당 절로 알리라.’ 말하기를 ‘제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지팡이를 어디에다 쓴답니까?’ 선생이 말하였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으리라.’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눈이 그 밝음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그려. 오늘 요술을 보니 요술쟁이가 능히 속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경하는 사람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입니다.’” 박지원, 『열하일기』, ‘환희기후지(幻戱記後識)’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열하일기 중』, 보리, 2004. 에서 인용)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게 된 장님은 오히려 시각(視覺)이 방해가 되어 어디가 어디인지 우왕좌왕, 갈팡질팡하게 되어 자신이 매일 찾아가던 집조차 찾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눈을 감고 다시 장님으로 돌아가면 평소 그가 사용한 감각과 습관 그대로 집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필자가 생각할 때 여기에서 박지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만약 당신이 외물(外物), 즉 견문과 지식, 명예와 출세에 현혹되어 동심을 잃어버렸다면 눈 뜬 장님이 다시 장님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외물의 유혹과 욕망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본래의 마음, 곧 동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라.”

이것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세상사와 인간사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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