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이 최강의 로마군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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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이 최강의 로마군을 만들었다?”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5.04.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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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먹을 수 있는 햄버거는 각국의 문화와 식생활에 맞춰 세계인이 향유하는 보편적 음식이 되었다.

전 세계 120개국에 지점을 가진 맥도날드를 필두로 한국의 롯데리아, 일본의 모스버거, 벨기에의 퀵, 필리핀의 졸리비 등 다양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다양한 햄버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햄버거의 주재료에 해당하는 흰 빵과 쇠고기는 2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수의 지배층만이 즐길 수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 20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880~1914년은 요리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소득이 늘어난 중산층과 노동계층이 식품가공산업의 소비자로 급부상한 것이다. 식품 가공 산업은 이들이 즐겨먹는 흰 빵과 쇠고기를 저렴한 값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의 새로운 정치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왕과 귀족이 먹는 고급 요리와 평민이 먹는 하급 요리가 분명히 구분됐던 과거와 달리 많은 이들이 계급에 상관없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밀과 고기는 가공을 거쳐 햄버거가 되고, 여기에 문화와 철학이 더해져 미국 고유의 음식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된다.

요리와 음식은 인류의 문명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류는 보다 나은 음식을 먹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요리법을 만들어냈다. 이는 제국의 탄생, 권력의 이동, 종교의 확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음식의 탐구가 곧 문명의 발전으로 이어진 셈이다.

신간 『탐식의 시대』(다른세상)는 요리와 음식이라는 색다른 렌즈를 통해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들여다본다.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로마·영국 등 한 시대를 호령했던 제국의 흥망성쇠, 이슬람교·불교·기독교 등 주요 종교의 탄생과 확산, 고대의 노예제 사회나 중세의 봉건 사회 시대부터 자유와 평등을 주요 골자로 한 민주주의 사회로의 이행까지 인류의 모든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BC 500년에서 AD 400년까지 유라시아에서는 거대한 제국이 잇따라 탄생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큰 제국은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나라였다.

공화주의에 영향을 받은 로마는 앞선 페르시아 제국이나 마케도니아와 달리 간소하고 절제된 음식을 선호했다. 이는 전쟁을 본업으로 삼은 로마의 특성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로마의 병사들은 맷돌을 짊어지고 다니며 야영지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었고 로마의 장교들은 배급량을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로마군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 건 회전식 맷돌을 도입하면서부터였다. 기존의 맷돌을 사용하면 한 개 분대(8명)가 먹을 곡식을 가는 데 적어도 네댓 시간이 걸렸다. 반면 회전식 맷돌을 사용하면 한 시간 반 만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로마는 이 효율적인 기술을 제국 전역에 퍼뜨렸다. 그 결과 또 다른 유럽 병사들이 로마 군단병들만큼 잘 먹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1500년이 흘러야 했다. 새로운 조리 도구의 도입이 최강의 군대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다른 제국의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유럽은 재해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해군에게 가장 위협은 적군이 아닌 괴별형이었다. 영국은 수병의 음식을 개선하고 괴혈병 환자를 줄이기 위해 식량공급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들의 오랜 노력 끝에 18세기 말 영국의 해군은 배에서도 완전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감귤 즙은 괴혈병의 발병률을 낮추었고 정기적으로 나오는 소량의 브랜디나 럼은 해군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일주일에 네 차례 나오는 고기, 밀가루로 만든 비스킷 혹은 빵, 풍족한 맥주, 때때로 나오는 과일과 야채가 그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선원들이 훨씬 건강해진 덕분에 배가 바다에 머무는 시간은 1700년 2주에서 1800년엔 3개월로 크게 늘어났다. 이는 바다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네덜란드나 프랑스 해군과 비교했을 때 영국군이 갖는 큰 이점이었다.

영국 해군의 역사가 N.A.M.로저는 “영국 함대의 해상 작전 수행 능력을 바꾼 것은…무엇보다 식량공급위원회였다.…이로써 영국은 명백하게 진정한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인도, 동남아시아,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의 요리는 완전히 제각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쌀을 중시하고 육식을 절제하는 특징을 통해 불교 요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붓다는 동물의 희생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살생하지 말 것을 5계 가운 데 하나로 지시했다. 그 결과 살생이 필요한 육식이 문제가 됐다.

승려들은 고기를 대신할 음식들을 꾸준히 개발했고, 그 결과 두부와 글루텐, 다른 여러 인조고기가 탄생했다. 두부는 1~2세기에 맷돌과 우유 가공에 관한 지식이 전파되면서 처음 생겨났는데, 그 후에는 불교 요리뿐 아니라, 다른 금욕주의적 요리에도 널리 이용되었다.

하지만 요리 철학은 종교의 확산을 위해 지역에 맞게 변화하는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일례로 7세기 불교가 전파된 티베트의 경우 고원지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불교도들이 선호하던 쌀이나 설탕, 야채들을 생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 불교도들은 육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도살을 위해 날이 휘어진 특별한 칼을 성물로 여기기까지 했다.

훗날 중원을 차지한 몽골인들은 원나라를 세운 후 이 티베트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그들 역시 육식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국가나 종교에 상관없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지도자가 국교를 선택했고, 이에 따라 그 나라의 음식 문화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지배층은 종교의 요리 철학을 살핀 후 자신들의 견해와 맞는 것을 선택하고는 했다.

『초기 연대기』에 따르면 10세기 말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국가의 종교를 결정하기 위해 이슬람교도, 유대인, 서방 기독교도, 비잔틴인 사절들을 불러 모았다. 돼지고기와 술이 금지돼 있다는 이슬람교도의 설명에 블라디미르는 콧방귀를 뀌었다.

서방 기독교인은 금식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고, 유대인 사절단은 돼지고기와 토끼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두 집단 모두 짐을 싸서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비잔틴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이 먹는 것은 빵과 포도주라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는 신중하게 검토한 끝에 988년 빵, 포도주, 돼지고기로 이루어진 비잔틴 요리를 국가의 요리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종교는 고유의 요리 철학을 바탕으로 지배층과 결탁하거나 비주류 세력의 틈새로 파고들며 확산을 꾀했다.

일례로 기독교 요리는 AD 100년경 아직 견고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유대 요리나 로마 요리와 구분되지만 너무 이상하거나 맛이 없어 혹은 만들기 어려워 잠재적 개종자들이 등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기독교 요리가 완전히 확립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약 20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빵과 포도주, 축제와 금식이라는 단순한 특성으로 무장한 기독교 요리는 훗날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요리와 음식은 당대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체제 그리고 건강과 질병, 윤리와 종교에 대한 신념이 숨어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문명사를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식문화가 갖는 의미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제시한다.

저자는 식품가공산업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신선한 천연식품에 열광하는 오늘날의 분위기를 그 예로 든다. 더 좋은 음식을 보다 자연적이며, 가공이 덜 되고, 가정에서 요리된 음식으로 단정 지을 경우 자칫 그간 이루어진 요리의 혁신과 전파를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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