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질과 붓질…자책(自責) 속에 담긴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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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질과 붓질…자책(自責) 속에 담긴 뜻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17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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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㉝
▲ 탑골공원 내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옛모습.

[한정주=역사평론가] 아침에 일어나 오이밭을 호미질하다가 마루에 올라가 붓을 잡으면 팔이 몹시 떨려 마치 바람 속에 배가 요동치듯 한다.

혹자가 기이한 것을 좋아하므로 짐짓 전필(顫筆 : 떨린 글씨)을 쓰는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병을 참으로 짐짓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병이 아니기 때문에 떨리는 정신을 반드시 꾸짖어버리는 것이다.

6월 아침에 형암(炯菴)은 원각탑(圓覺塔) 동쪽에서 쓴다.(재번역)

朝起鋤苽畦 上堂把筆 腕大戰如風中舟歟 或疑好奇 故作顫筆 病固可以故作乎 匪病故顫 神必呵之 六月朝 炯菴書于圓覺塔東. 『이목구심서 2』

원각탑(圓覺塔)은 종로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10층석탑’이다. 이덕무와 그의 사우(師友)들은 모두 백탑(白塔)이라고 불렸던 이 원각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이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터다. 내가 18~19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서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의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이덕무와 가장 절친했던 박제가가 남긴 기록이자 증언이다.

지금 내 삶의 일부와 같은 집필실이자 강의실도 탑골공원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친한 벗들과 어울려 지낼 때면 간혹 마치 이덕무와 그의 사우들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어쨌든 붓을 잡는 손으로 호미를 잡는 일이 쉽겠는가? 글을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이덕무의 자책(自責) 속에 담긴 뜻을 수 백 수천 번 되새김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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