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인가 저것인가?…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위태롭고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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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인가 저것인가?…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위태롭고 모호하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05 0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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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㉒
 

[한정주=역사평론가] 사람이 사냥개를 시켜서 사슴을 쫓게 하면 사슴은 반드시 미친 듯 내달린다. 개가 그 뒤를 쫓아가 거의 물려고 할 때 사람이 사냥개를 불러서 먹이를 주고 쉬게 한다.

그러면 사슴은 반드시 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돌아다보고 서 있다. 개가 다시 사슴을 쫓다가 또한 방금 전처럼 쉬면 사슴 역시 예전과 같이 기다린다.

대개 여러 차례에 걸쳐 그렇게 하면 사슴은 기력을 다해 넘어지고 만다. 그때 바로 개가 이빨로 사슴을 물어서 죽인다. 그것은 인(仁 : 어짐)인가 혹은 신(信 : 믿음)인가.

곰과 호랑이가 서로 싸울 때 호랑이는 발톱과 어금니를 크게 벌리고 위세(威勢)를 모아서 힘을 쓰는데 전념한다. 곰은 반드시 사람처럼 서서 큰 소나무를 구부려 꺾고 힘껏 내리친다. 한 번 내리친 나무는 버리고 쓰지 않고 다시 소나무를 꺾는다.

노고는 많지만 힘이 꺾여 끝내는 호랑이에게 죽고 만다. 그것은 의(義 : 의로움)인가 혹은 정(貞 : 곧음)인가.

사람이 산골짜기에 가로질러 나무를 걸어놓고 거기에다가 노끈으로 엮은 올가미를 설치해놓으면 담비 무리가 물고기 떼처럼 나무를 건넌다. 앞서 가는 놈이 머리를 시험 삼아 올가미 속에 집어넣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키는 대로 한다.

그러면 뒤 따라 오는 놈들은 먼저 머리를 올가미 속에 집어넣으려고 다툰다. 모름지기 잠깐 사이에 수많은 담비가 목이 매달려 죽고 마는데 살아남은 놈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그것은 순(順 : 순종)인가 혹은 공(恭 : 공손)인가.

사람이 오직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만 있고 이렇게 저렇게 융통하는 이치에 밝지 못하다면 단지 명분 없는 일에 자신의 몸만 해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슴이나 곰이나 담비로서 의관(衣冠)을 한 자이다. (재번역)

人嗾獵犬逐鹿 鹿必疾走 犬隨其後 庶幾嚙焉 而人呼犬與飧休息 鹿必竢犬至顧望而立 犬復逐之 而又如前休 鹿又如前竢 凡數度鹿力盡而蹶 犬廼嚙其勢而斃之 其仁耶信耶 熊與虎相闘也 虎張爪牙 挾之以威 其用力也專 熊必人立 仰拉長松力擊之 一擊而棄不用 復拉松 勞則多 而力歧也 終爲虎所殺 其義耶貞耶 人橫木于壑 設繩套于木 貂羣魚貫而度木 先行者以首試納于套中 若甘心焉 後至者爭先納首 須臾間累累雉經 無一遺焉 其順耶恭耶 人惟有一偏之見 而不能委曲通暢者 只戕身於無所名之事 是鹿也熊也貂也 而衣冠者也. 『이목구심서 1』

사람들은 대개 이분법, 즉 이것과 저것 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는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이덕무의 사우였던 박지원은 이렇게 말한다.

“참되고 올바른 식견(識見)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라고. ‘낭환집서(蜋丸集序)’에 나오는 말이다.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란 정녕 천지자연 및 우주만물과 인간의 관점과 인식 사이의 중간 지점, 즉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물 및 대상과 작자의 ‘사이와 경계’가 분리되고 통합되는 어느 지점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박지원조차도 그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 존재하는 ‘중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물며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 존재하는 ‘중간’이란 결코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이치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까닭에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는 극단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견해의 다양한 전환과 관점의 무궁한 변환만이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 존재한다는 ‘중간’의 실체와 진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쪽에 치우친 견해만 고집하며 이리저리 소통하거나 이렇게 저렇게 융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이덕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중간’에 존재한다는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란 마치 니체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묘사한 ‘광대의 줄타기’와 같은 것은 아닐까?” 라고.

줄 위에 서 있는 광대는 이쪽으로 기울어져도 떨어지고, 저쪽으로 기울어져도 떨어진다.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면 다시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떨어지지 않고,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이쪽과 저쪽의 사이 혹은 왼쪽과 오른쪽의 경계 곧 중간에 존재하는 어느 지점을 쉼 없이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줄타기의 종착점에 비유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은 아닐까?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그렇듯 위태롭고 모호하기 그지없다.

이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편견(偏見)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진리의 실체에 다가가기는커녕 오히려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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