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매임과 자유로움…“네 멋대로 쓰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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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임과 자유로움…“네 멋대로 쓰면 될 뿐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2.23 0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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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⑬
 

[한정주=역사평론가] 사람이 이미 한번 세상이라는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되면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은 물론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십 중의 팔구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그치는 데에도 제지당하는 것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일어난다. 조그마한 육신을 전후(前後)와 좌우(左右)로 움직이는 데에도 걸리고 얽히지 않은 것이 없다.

걸리고 얽힌 것을 잘 운용하는 사람은 비록 천 번 제지당하거나 만 번 억압당해도 그 걸리고 얽힌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또한 그 걸리고 얽힌 것에 노예가 되어 부림을 당하지도 않는다. 때에 따라 굽히기도 하고 때에 따라 펴기도 하면서 제각각 그 마땅함을 극진히 하면 걸리고 얽힌 것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나의 온화한 기운 역시 손상되지 않아 자연스럽고 순조로운 경계 속에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저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얽어매는 것을 견디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찔러 피를 뽑아 경문(經文)을 베끼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쌀을 동냥하는 것을 오히려 온몸을 얽어매거나 더럽히는 곳보다 더 고통스럽게 여겨 모든 것에 제지당한다.

이것은 조급하거나 흐려져서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재앙일 따름이다. 마치 원숭이가 전갈 떼의 독에 쏘이게 되면 혹은 피하거나 혹은 제거해 전갈을 처치하는 방법을 세울 줄은 모른 채 단지 걱정하고 괴로워하며 떠들썩하고 수고롭게 왼쪽을 긁다가 오른쪽을 씹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갈이 더욱 쏘아대면 잠깐도 견뎌내지 못하고 자빠져 죽은 다음에야 멈추는 것과 같다. (재번역)

人旣一墮于地 無論富貴貧賤 不如意事十常八九 一動一止 掣者蝟興 眇然之身 前後左右 無非肘也 善運肘者 雖千掣萬掣 不置肘於心 亦不爲肘所僕役 時屈時申 各極其宜 則不惟不傷肘 亦不損吾和氣 可自然遊順境中耳 彼祝髮入山者 苦不耐其掣之多也 然刺血鈔經 行脚乞米 反苦不勝渾身之肘觸處皆掣也 是躁擾爲祟耳 如胡孫爲群蝎所螫 不知或避或除 善計處蝎之方 只煩惱騷屑 左爬右嚼 不少須臾耐了 蝎螫愈肆 斃而後已. 『이목구심서 1』

소품문의 미학적 가치는 ‘얽매임으로부터의 해방’과 ‘무한의 자유로움’에 있다. 아무런 목적과 이유 없이 그냥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붓끝을 따라 써 내려가면 된다.

한 줄만 써도 괜찮고, 열 줄을 써도 좋고, 백 줄을 써도 상관없다. “네 멋대로 쓰면 될 뿐이다.”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해로운 적은 얽매임과 구속이다. 만약 누군가 그 얽매임과 구속 가운데 가장 큰 해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검열’이다.” 스스로를 얽어매고 구속하는 것 보다 더 심한 해악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까닭에 글을 쓰는 사람은 마땅히 1960년 10월 반공(反共)과 반북(反北)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김일성 만세’라는 제목의 시를 썼던 김수영의 문학 정신을 배워야 한다.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언론과 정치와 사상과 문학의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김수영의 선언은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할 참된 가치이자 미학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될 뿐 왜 자신을 검열하고 세상의 시선을 살피고 권력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그렇다면 글을 쓸 때 가장 이로운 벗이 무엇인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바로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다. 이때도 참고할 만한 문학 정신이 있다.『생활의 발견』의 저자 린위탕(林語堂)이 1930년대 초에 한 말이다.

“소품문은 원래 일정한 범위가 없다. 자신의 의론(議論)을 펼쳐도 좋고, 감정(感情)을 풀어도 좋고, 인정(人情)을 묘사해도 좋고, 세태(世態)를 표현해도 좋다. 사소하고 잡다한 것은 물론이고 하늘로부터 땅 끝까지 무엇이든 글로 옮겨 적을 수 있다.”

만약 글이 갖추어야 할 형식과 내용 혹은 분량과 구성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소품문을 써보라. 잡감(雜感)을 써도 소품문이 되고, 편지를 써도 소품문이 되고, 신변잡기를 써도 소품문이 되고, 일기를 써도 소품문이 된다. 심지어 메모와 낙서까지도 소품문이 될 수 있다.

그러한 글이 하루하루 쌓여가다 보면 혹시 이덕무의 소품문 모음집인『이목구심서』나『선귤당농소』와 같은 책이 탄생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수광과 이익이 본래 저서의 출간에 뜻을 두지 않고 하루하루 써놓은 글을 훗날 모아 엮은 책이『지봉유설』과『성호사설』이고, 이덕무가 일상생활 속의 주관적인 감성과 생각을 마음 내키는 대로 써놓았다가 모아 엮은 것이『이목구심서』와『선귤당농소』였다.

아무런 목적 없이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감성과 생각을 글로 쓰는 것. 이 정신만 잃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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