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자유에서 삶의 자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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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자유에서 삶의 자유로”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3.20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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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⑪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자유로운 삶을 위한 조건Ⅳ

[한정주=고전연구가] 『그리스인 조르바』 속 크레타 섬 생활은 관념적으로 자유로운 카잔차키스와 삶 자체가 자유로운 조르바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조화와 변화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엮어져 있다.

조르바를 학교 삼아, 그리고 조르바의 삶을 텍스트 삼아 카잔차키스의 자유는 ‘관념의 자유’에서 ‘삶의 자유’로 이행해간다. 특히 조르바를 만나고 나서 ‘인간 그 자체가 자유’라는 깨달음을 얻은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유를 찾아가는 마지막 단계의 오름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것은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들까지 대상으로 하는 모든 우상들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려는 새로운 투쟁”이었다. 모든 우상들에는 영원, 사랑, 희망, 이상, 민족, 국가, 하느님과 함께 호메로스, 예수, 베르그송, 니체, 레닌은 물론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만나기 전까지 “최후의 우물, 마지막 심연의 언어이며 영원한 구원의 문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붓다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 순간 카잔차키스의 내면에서 붓다의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억압하는 우상이자 허깨비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들에게서 풀려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P264)

조르바를 만나기 이전 카잔차키스가 엿본 자유는 호메로스, 예수, 베르그송, 니체, 붓다, 레닌 등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들의 자유였다. 그런데 니체의 자유를 통해 자유롭고자 하면 오히려 니체의 자유에 갇히게 되고, 붓다의 자유를 통해 자유롭고자 하면 도리어 붓다의 자유에 갇히게 되는 역설이 발생했다.

니체의 자유와 붓다의 자유라는 사유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관념적이고 이념적인 자유의 한계이다. 그런데 조르바는 어떤가. 그는 어떤 종교에도 구애받지 않고 어떤 사상에도 구속당하지 않으며 어떤 이념에도 굴종하지 않고 어떤 체제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이다.

카잔차키스가 볼 때 조르바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과 “하찮은 겁쟁이 인간들이 세워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민족이나 조국 따위를 때려 부수는 야수적인 웃음”을 지닌 인간이다.

조르바는 내세의 구원과 다가올 천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현세의 욕망과 현실의 쾌락을 억압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다. 조르바가 지니고 있는 “생동하는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죽음조차 초월하는 담대한 용기” 그리고 원초적 생명력은-카잔차키스가 그토록 갈망했던-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외쳤다.

“만약 내 삶에서 영혼의 길잡이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분명하게 조르바를 선택할 것이다”(『영혼의 자서전』, ‘조르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예수도 붓다도 아니고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 위대한 사상가인 호메로스도 베르그송도 니체도 아닌 일자무식의 그리스 민중 조르바에게서 비로소 ‘자유’를 보았다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체험이고 위대한 발견인가.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생활하면서 니체의 자유가 오히려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고 붓다의 자유가 도리어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역설을 체험했다.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가르침도 모르고 붓다의 가르침도 모르지만 정작 니체와 붓다의 가르침에 정통한 자신보다 훨씬 자유로운 조르바를 통해 자유로운 삶의 진실을 발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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