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과 하나 되는 길’ 보여준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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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과 하나 되는 길’ 보여준 붓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3.13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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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⑪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자유로운 삶을 위한 조건Ⅲ

[한정주=고전연구가] 세 번째 오름의 단계는 붓다와의 만남이었다. 카잔차키스는 붓다에게서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과 “육체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육체에서 해방되어” 결국에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길을 보았다.

기독교 문명의 영향 아래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카잔차키스에게 “가장 근본적인 고통과 모든 기쁨과 슬픔의 원천은 정신과 육체 사이의 끊임없고 무자비한 투쟁”이었다. 정신을 찬양하고 육체를 부정하는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고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영혼의 자유를 찾아가는 카잔차키스의 여정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쉼 없는 투쟁이었다.

“나의 영혼은 이들 두 군대가 마주치고 충돌하는 전쟁터였다. 고통은 극심했다. 나는 내 육체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이 전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내 영혼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이 붕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적대적이면서도 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가진 이 육체와 영혼을 화해시키려고 싸웠다. 그렇게 해서 육체와 영혼이 둘 사이의 조화에서 큰 기쁨을 얻고, 그래서 나 역시 그들과 함께 큰 기쁨을 누리기 위해 싸웠다.”

카잔차키스가 붓다를 통해 본 것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한 영혼의 구원의 경지였다. 카잔차키스는 붓다와의 만남이 ‘영혼마저도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을 찾아가는 반항과 투쟁의 여정에서 마지막 오름의 단계라고 생각했다.

카잔차키스는 붓다야말로 자유를 향한 투쟁에서 자신이 마주한 최후의 인간이요 최후의 격전장이라고 확신했다. 붓다를 넘어서면 마침내 영혼의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르바를 만난 이후 붓다의 자유는 카잔차키스의 내면에서 철저하게 파산하고 만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스 동포를 구하러 떠나는 친구에게 ‘대책 없는 책벌레’라는 냉소와 조롱 섞인 말을 듣고 난 후 고향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만났다. 처음 만난 카잔차키스와 조르바는 크레타섬에 가서 갈탄광 사업의 파트너가 되기로 한다.

조르바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엄청난 충격의 파장을 던졌다. 조르바는 지금까지 카잔차키스가 거쳐 온 인류의 그 어떤 위대한 스승의 사상이나 논리를 빌지 않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자유’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르바씨, 이야기는 끝났어요. 나와 같이 갑시다. 마침 크레타엔 갈탄광이 있어요. 당신은 인부들을 감독하면 될 겁니다. 밤이면 모래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먹고 마십시다. 내겐 계집도 새끼도 강아지도 없어요.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당신은 산투르도 치고 …’,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출 수 있소.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인지요?’ ‘자유라는 거지!’”(『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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