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악덕과 추악함을 모두 끌어 모아놓은 집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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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악덕과 추악함을 모두 끌어 모아놓은 집합체”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11.2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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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⑨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탐욕과 광기와 식인의 역사Ⅲ

[한정주=고전연구가] 걸리버는 ‘소인의 나라’ 릴리펏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다시 존 니콜라스 선장이 모는 ‘어드벤처 호’에 올라 항해에 나서게 된다.

항해에 나선 지 1년여 가까이 지난 어느 날 걸리버를 태운 배는 오랫동안 폭풍우에 시달리다가 겨우 육지를 발견한다.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존 니콜라스 선장이 무장한 선원 열 명과 함께 상륙할 때 걸리버 역시 그들 일행을 따라간다.

일행과 떨어져 해안가를 따라 걷던 도중 걸리버는 선장과 선원들이 거대한 사람에게 쫓겨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낙오되어 낯선 곳에 홀로 남게 된다. 결국 거인들에게 붙잡힌 걸리버는 신기한 동물 취급을 당하며 ‘거인의 나라’의 기이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걸리버에 관한 소문은 귀족부인들과 왕비에게까지 전해진다. 그 바람에 걸리버는 ‘거인의 나라’의 왕궁에까지 드나들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왕비는 걸리버를 만난 후 “이토록 작은 동물이 지혜와 분별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거인의 나라’의 국왕에게 데려간다.

이후 걸리버는 국왕과 왕비를 즐겁게 해 줄 목적으로 여러 기구와 장치를 만들고 음악회를 열어 재능을 선보이기도 한다. 걸리버를 점점 더 높게 평가하게 된 국왕은 마침내 걸리버에게 유럽의 정세, 즉 정치와 역사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여러 차례에 걸친 대화 도중 어느 날 걸리버가 “지난 세기 동안 영국에서 발생한 온갖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설명하자” 국왕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국왕은 걸리버가 들려준 영국의 역사와 사건들에 대해 이렇게 비평하면서 규탄한다.

“그것은 단지 음모, 반란, 살인, 대학살, 혁명, 추방 등을 한 무더기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며, 그와 같은 것들은 탐욕, 파벌 싸움, 위선, 배반, 잔혹 행위, 격분, 광기, 증오, 시기, 욕망, 적의 또는 야심 등이 낳은 최악의 결과물일 뿐이다.”

‘거인의 나라’ 국왕이 한 말, 즉 영국에서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란 단지 인간의 탐욕과 악덕과 추악함을 모두 끌어 모아놓은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더럽고 추악하며 끔찍하고 잔혹한 ‘탐욕과 광기의 역사’일 뿐이라는 비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인류라는 종족은 물론 인간의 역사 전체에 대한 비판이자 고발이며 풍자이다. 더욱이 걸리버와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역사가 침략과 학살과 파괴의 연속에 다름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 ‘거인의 나라’의 국왕은 자신이 받은 정신적 혼란과 충격을 이렇게까지 표현했다.

“그대의 동포인 인간 무리는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대지 위를 기어 다니는 작고 끔찍한 수많은 해충 가운데에서도 가장 추악하고 해로운 종족이다.”

인간 자신과 인간이 만든 역사에 대해 이보다 더 처절한 경멸과 신랄한 조롱과 통렬한 공격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걸리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국왕의 총애를 얻고 싶은 마음에 가공할 위력을 갖춘 화약과 대포 제조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한다. 걸리버가 알고 있는 한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국왕들이 좋아하는 것 가운데 이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300~400년 전에 발명된 화약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화약뭉치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불꽃이라도 닿는다면 순식간에 천동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여 산만한 것도 하늘 높이 날려버립니다. 놋쇠나 철로 만든 원통에 적절한 양의 화약, 납이나 철로 만든 포탄을 쑤셔 넣고 불을 붙인다면 그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를 이겨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포탄이 발사되면 삽시간에 부대가 궤멸되고,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며 1000명도 넘게 탄 배가 바다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또 포탄을 사슬로 연결시켜 놓으면 돛대나 줄은 물론이고 수백 명의 선원의 몸까지 찢어버리고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박살내버릴 수 있습니다. 저희는 때때로 속이 빈 포탄에 화약을 채워서 투석기로 포위 중인 도시에 쏘았습니다. 그러면 포탄이 터지면서 도로와 집이 파괴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머리가 산산조각납니다. 저는 화약의 구성 성분과 재료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값이 매우 저렴한 데다가 흔해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재료들을 합성해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숙련된 기술자만 불러주시면 이 나라에 맞는 크기의 대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포신도 100피트면 충분하지요. 화약과 포탄을 채운 대포 20, 30문만 있으면 튼튼한 성벽도 몇 시간이면 무너뜨릴 수 있고 감히 전하께 맞서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의 도시 전체를 괴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거인의 나라’의 국왕은 걸리버의 소망대로 뛸 듯이 기뻐했을까. 오히려 국왕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기계에 대한 제안과 설명에 대해 몸서리를 치며” 기겁했다. 걸리버가 옮긴 그대로의 표현대로 국왕은 “그대가 말한 그 파괴적인 기계는 인류의 적인 사악한 악마가 바로 최초로 고안해 만든 물건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걸리버에게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이렇게 힐책했다.

“너희처럼 아주 나약하고 비굴하고 미천한 벌레에 불과한 존재가 어떻게 그토록 잔혹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지, 또한 아무런 동요 없이 그 파괴적인 기계가 초래할 피비린내 나는 파괴의 장면을 그토록 천연덕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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