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실학·경제학 종합보고서 『성호사설』의 역사·지리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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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실학·경제학 종합보고서 『성호사설』의 역사·지리적 해석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5.02.0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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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의 초상

18세기 실학과 경제학의 거두였던 성호 이익은 유학의 경사(經史)는 물론 경제, 풍속, 문화, 천문, 지리, 문학, 종교, 음악, 과학기술 등 학문의 전 분야에 걸쳐 다양하고 풍부한 저술과 기록을 남겼다.

그의 백과전서(百科全書)적인 학풍은 18세기 실학과 경제학의 발전에 깊고 넓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활동한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이익 학문의 ‘샘물’을 마시면서 실학의 세계관과 개혁론을 다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익 학문의 산실(産室)은 26살 되던 1706년 입신양명의 꿈을 완전히 접고 들어간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이다. 그는 이곳에 거처하면서 죽음을 맞는 83살 때까지 오로지 독서와 사색 그리고 저술과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이익의 학문 및 사상 세계는 주류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됐다. 그는 성리학의 틀에 안주한 채 사대부 권력을 옹호하고 사회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나라의 부강함과 백성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실제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이익은 ‘조선이 개국한 이후로 시무(時務)를 안 사람은 아무리 손꼽아 봐도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두 사람’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부국강병 및 사회 개혁론이야말로 이익이 추구하는 실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정통성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익의 학문 세계는 서학(西學), 즉 서양의 천주교와 과학 기술에 대해서도 아주 개방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훗날 남인 계열에서 서학 혹은 천주교에 매혹당한 학자들이 다수 나온 배경에는 이러한 이익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학풍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자 성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익의 학문 세계는 전 분야로 뻗어 나갈 수 있었고 자신의 직전(直前) 제자들이나 후대에 자신을 사숙한 제자들에게 ‘지식과 정보, 문헌과 기록의 무궁무진한 보고(寶庫)’를 남겨줄 수 있었다.

그 보고가 다름 아닌 『성호사설(星湖僿說)』이다.

신간 『성호사설의 세계: 역사적 사유와 지리적 해석』(푸른길)은 성호 이익을 연구해 온 한국학중앙연구원 강병수 수석연구원과 손용택 교수가 『성호사설』을 다룬 논문을 한데 모아 엮었다.

역사와 지리를 전공한 두 저자는 3000여 항목으로 이루어진 내용을 5개의 문, 즉 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으로 나누어 구성한 『성호사설』을 기반으로 이익의 학문세계와 역사관, 세계관, 우주관을 들여다본다.

 

또 선진적인 지리관을 중심으로 지리적 사고 및 관심 등을 고찰하면서 지리학적인 내용과 관련 사실 등을 찾아 해석하고 정리했다.

『성호사설』에 대해 이익은 자신을 낮추어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글’이라는 ‘사설(僿說)’을 책의 제목으로 삼았지만 당시의 학문·사상은 물론 사회 현실과 실생활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총망라돼 있는 백과전서(百科全書)였다.

이익의 학문 및 사회 개혁론이 완숙한 수준에 이른 40세부터 죽음을 맞이하기 3년 전까지 저술한 글들이 모두 담겨 있는 만큼 18세기 조선 실학과 경제학의 ‘종합 보고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저자들은 “고전 속에 담긴 사상과 철학, 지혜를 통해 고금의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는 현주소를 알아보는 일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며 “이것이 이 책의 필요성이며 목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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