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정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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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정의’는 없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06.2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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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⑤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이것이 정말 정의인가?Ⅱ
제단에 바쳐지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
제단에 바쳐지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

[한정주=고전연구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 살해로 시작해 오레스테스의 친모 살해로 끝이 나는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적인 복수극을 다룬 『오레스테이아』는 아테네 여신의 개입으로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그런데 끔찍한 사실은 이 비극적인 복수극에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모든 인물들의 행위가 정의로우면서 불의하고, 불의하면서 정의롭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불의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더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러워진다.

특히 이들, 즉 아가멤논, 클뤼타이메스트라, 아이기스토스, 엘렉트라, 오레스테스는 모두 자신의 행위가 ‘정의’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이의 행위는 ‘불의’하다고 강변한다. 『오레스테이아』 속에는 하나의 정의가 아니라 다섯 개의 정의가 있고, 하나의 불의가 아니라 다섯 개의 불의가 존재한다.

① 아가멤논의 정의 : 아가멤논의 비극은 그가 살해당하기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트로이 원정에 나선 아르고스 왕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항에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스 연합군의 침략 앞에 몰락의 고통을 겪을 트로이의 운명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진 아르테미스 여신이 역풍을 일으켜 그리스 연합군의 항해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때 예언자 칼카스가 나타나 아르테미스 여신을 달래기 위해서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칼카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 한 역풍은 멈추지 않고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땅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아가멤논은 깊은 고민과 갈등에 빠집니다.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살리기 위해서는 트로이 원정을 포기해야 하고 원정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을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켜 트로이 원정을 계속 진행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스 연합군을 진두지휘하는 총사령관인 자신이 딸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얽매여 트로이 원정의 대의(大義)를 배반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스로 “운명의 멍에를 목에 매기로” 결심하자 아가멤논의 마음은 돌변한다. 이 순간 사랑하는 딸의 목숨을 지켜야 할 아버지 아가멤논의 ‘정의’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오로지 트로이 원정을 지휘해야 할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르고스 왕 아가멤논의 ‘정의’만이 남게 된다.

아가멤논의 정의는 무엇인가. 국가와 권력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국가와 권력의 정의’이다. 이제 아가멤논은 ‘국가와 권력의 정의’의 잔혹한 수호자이자 무자비한 집행자일 뿐이다.

“그녀(이피게네이아)의 아버지(아가멤논)는 기도를 드린 뒤 시종들에게, 자기 딸이 졸도하거든 그녀가 입고 있는 겉옷으로 사정없이 휘감아 새끼 양처럼 그녀를 제단에 올려놓되 가문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도록 그녀의 아름다운 입을 틀어막으라고 명령했다네.” -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전집』, 「아가멤논」, 숲, 2008, p38.

②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정의 :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르고스의 궁전으로돌아온 바로 그날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남편을 살해한다. 이 순간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자신이 낳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한 자신의 행동은 너무나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외친다. 아가멤논의 정의가 ‘국가와 권력의 정의’였다면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정의는 ‘어머니의 정의’였다.

“나는 이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오. 그리고 시신에 제주를 붓는 것이 격식에 맞는다면, 이러한 내 행동은 정당하다 할 것이오. 정당하고말고요. …… 내 자식의 원수를 갚아주신 정의의 여신과 아테와 복수의 여신들에게 나는 이 사람(아가멤논)을 제물로 바쳤거늘, 이들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여전히 내게 충성을 다하는 아이기스토스가 내 화로에 불을 지피는 동안에는 나를 위해 희망이 공포의 집을 거니는 일은 없을 것이오.” -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전집』, 「아가멤논」, 숲, 2008, p8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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