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나멘…새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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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나멘…새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2.04.18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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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③ 박지원 『열하일기』…클리나멘-탈주·접속·성찰·변신Ⅱ

[한정주=고전연구가] 연암의 우울증은 그렇게 점차 나아졌다. 그러나 우울증을 앓고 난 이후의 연암은 더 이상 우울증을 겪기 이전의 연암이 아니었다.

10대 후반의 연암은 왜 거식증과 불면증을 동반한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을까. 그것은 연암이 명문 양반가 자제에게 정해진 삶의 정상 궤도, 곧 과거공부나 과거급제에 뜻이 없는데 집안 어른들의 눈치와 강권을 차마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와 권력과 출세를 바라는 현실의 억압이 충돌하면서 생긴 일종의 자아 분열 혹은 정신 분열이 우울증을 일으킨 것이다.

민옹을 만난 연암은 비로소 우울증의 이유를 깨우쳤다. 이 깨우침은 연암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민옹을 만난 이후 연암은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던 삶의 정상궤도에서 이탈했다. 정상궤도의 이탈은 곧-다르게 표현하면-양반 사대부 세계로부터의 탈주였다.

그럼 탈주한 연암은 무엇을 했을까. 연암은 명문 양반가 자식인 자신에게는 너무나 낯선 외부 세계, 즉 저자거리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도가 수련자 김신선, 한양의 거지대장 광문, 똥장군 엄행수, 거리를 떠도는 미치광이 선비 송욱·조탑타·김덕홍,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문장가 역관 이언진 등이 이때 연암이 만났거나 혹은 저자거리에서 듣게 된 낯선 외부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이들 저자거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글이 지금도 연암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마장전』, 『김신선전』, 『광문자전』, 『민옹전』, 『예덕선생전』, 『우상전』 등과 같은 풍자 소설이다.

연암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삶을 덮친 거식증, 불면증, 우울증이라는 ‘뜻밖의’ 사건을 자신이 속한 양반 사대부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어 낯선 외부, 즉 저자거리의 세계로 탈주하는 계기로 삼았다. 낯선 외부 세계와 접속한 연암은 그곳에서 조우한 수많은 타자들을 통해 자신이 속한 양반 사대부 세계의 위선과 모순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18세기 지성사를 뒤흔든 진보적 지식인 연암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대개 삶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할 경우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명문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경우, 취업 혹은 시험에 낙방한 경우, 결혼 혹은 사업에 실패한 경우 모두 인생의 패배자 혹은 실패자로 바라본다.

정상궤도로부터의 이탈이 패배 혹은 실패일까. 아니다. 오히려 정상궤도를 이탈하면 뜻밖의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 정상궤도를 이탈해야 비로소 낡은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마주할 수 있다.

‘정상궤도로부터의 이탈’을 가리켜 고대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이라고 말했다.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원자(분자)의 ‘경로 이탈 혹은 방향 선회’가 클리나멘이다. 이 경로 이탈과 방향 선회는 직선의 운동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수많은 우연한 원자적·분자적 마주침을 일으킨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클리나멘에 의해 일어나는 우연한 원자적·분자적 마주침이야말로 창조의 에너지이자 변화의 동력이다.

“자신들이 가진 무게라는 속성 때문에 원자들이 허공을 관통해 아래로 떨어질 때 절대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에게 그것들은 자신들의 직선 경로로부터 아주 조금, 단지 한순간의 위치 이동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작은 정도로 틀어진다. 만일 그것들이 직선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원자들은 빗방울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관통하여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일차적 성분들 사이에 어떤 충돌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자연은 결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강신주 지음, 『철학 vs 철학』, 오월의 봄, 2010, p67. 재인용>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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