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비굴함 강요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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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비굴함 강요하는 사회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4.12.0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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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드라마 '미생' 메인 티저 영업3팀편 중. <tvN 화면 캡처>

임원승진을 기대했던 C선배는 올해도 고배를 마셨다. 수년 전부터 발탁승진을 위해 회사 안팎으로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때마다 승진임원 명단에 C선배의 이름은 없었다. 이제 발탁은 고사하고 2~3년 아래 후배들보다 늦은 막차 승객이 돼버렸다.

과장에서 차장, 차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할 때만 해도 C선배는 발탁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지난해 인사를 앞두고 회사에서는 자회사 임원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제안했다.

그래도 C선배는 본사 임원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동안의 성과를 보더라도, 또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특성상 다소 늦더라도 임원 승진은 가능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임원승진 인사가 발표된 후 첫 주말에 위로 차 만난 C선배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한탄이었다. 자회사 임원은 물론 현 부장 직급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4년 10월 현재 전국 사업체 종사자 수는 1513만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정기적인 급여생활자, 흔히 샐러리맨으로 부르는 상용근로자 수는 1219만명이다.

이들은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노동시간이 길어도, 야근과 철야가 반복돼도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행복해 한다. 연봉인상과 승진이라는 당근이 없어도 일상화돼 버린 구조조정 대상으로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 것만으로 온갖 모멸을 참는다.

나이가 늘고 직급이 오르면서 그 가능성과 강도는 더욱 높아지지만 실업의 공포라는 현실 앞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

평생직장이 폐지되고 능력에 따른 연봉제 도입 등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경쟁이 창출된 사회에서 샐러리맨의 위상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앞세워 실업마저도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보다 많은 수입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는 과정으로 해석돼 어느 정도의 실업은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어려운 길보다는 차라리 비굴해져도 살아남는 쉬운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나이 50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들’이란 글이 나돈다. 초년 성공은 오히려 인생의 독이 되고,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가며, 아무리 성과를 많이 냈어도 퇴사하는 순간 회사는 나를 금방 잊어버린다는 등의 내용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이 한창일 때 나온 글로 샐러리맨의 자조 섞인 모습을 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과거 샐러리맨들의 자부심으로도 해석된다. 출퇴근만 반복하는 피동적인 샐러리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쳐 열정을 보였던 과거의 능동적인 샐러리맨에 대한 홀대를 거부하는 역설인 것이다.

언제부턴가 샐러리맨들 사이에서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진리(?)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소신보다 복종, 굴복, 비굴함 등이 앞선다.

요즘 케이블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미생’은 이 같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이다. 대부분은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나와 닮은 캐릭터’를 그려보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도 아니다. TV를 시청하는 순간과 실제 직장에서 나의 캐릭터는 상반된다.

완전고용이라는 케인스주의적 목표를 채택하지 않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가 낳은 샐러리맨이라면 당연하다. 개인 캐릭터가 아니라 비굴함을 강요하는, 샐러리맨의 머리와 가슴을 따로 놀게 하는 구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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