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여 년의 사랑과 로맨스, 까르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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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여 년의 사랑과 로맨스, 까르띠에
  • 심양우 기자
  • 승인 2014.01.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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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과 오브제 아트의 세계 최고의 디자인·제조업체로 널리 알려진 까르띠에는 1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전설적인 브랜드다.

세기 반 이상의 시간을 통해 보석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예술적 영감으로 만들어낸 까르띠에 하우스의 놀라운 장인정신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수많은 매력적인 제품들로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하나의 보석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까르띠에 하우스는 수많은 단계를 거친다.

까르띠에의 예술적 영감을 통해 생성되는 모티브의 콘셉트는 최초에는 단어로만 존재한다. 이후 무수한 스케치와 회의, 수정의 반복 과정을 통해 레이아웃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제작 단계에 들어간다.

그리고 여러 색의 왁스로 테스트용의 기초적인 형태를 제작해 아이디어를 더욱 구체화한다. 석회 주물, 연마과정, 광택과정, 양각세공과정, 비늘 세공, 브러싱 공정, 보석의 세팅 과정 등을 거치게 되며 각 과정마다 또 다시 수많은 검사와 수정이 이루어진다.

까르띠에의 모든 작업은 자연광을 이용한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다.

▲ 까르띠에가의 형제들
‘왕의 보석상, 보석상 중의 왕’
세계 최고의 보석상 까르띠에는 파리의 한 보석상의 숙련공이었던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가 1847년 그의 주인이었던 아돌프 피카르로부터 파리 몽토르겨이(Montorgueil)가 29번지의 보석 아뜰리에를 인수받으면서 시작됐다. 루이-프랑소와 까르띠에는 한 해 전 그의 이니셜인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을 그의 장인(匠人) 마크로 등록한다. 바로 까르띠에 하우스의 탄생, 기나긴 러브 스토리의 시초다.

1899년 까르띠에는 새로운 세기를 맞아 보금자리를 옮겨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부 뤼 드 라 빼(rue de la Paix) 13번지에 그 장을 연다. 까르띠에의 정신과 어울리는 겉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알프레드는 그의 세 아들에게 까르띠에 하우스의 해외 경영을 맡김으로써 국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 까르띠에 런던 부티끄의 초창기 모습(좌측)과 지금의 뉴욕 까르띠에 부띠끄.
루이-조제프(Louis-Joseph, 1875-1942)는 파리를 맡고, 자끄-떼오뒬(Jacques-Théodule, 1884-1942)는 런던, 삐에르-까미으(Pierre-Camille, 1878-1964)는 뉴욕에 각각 터를 마련하여 사업 영역을 넓혀간다.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왕의 보석상, 보석상 중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은 까르띠에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또 예술 장르까지 보석의 영역을 넓힌 창조자로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 3대를 거치면서 까르띠에는 세계 최고의 보석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훗날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King Edward VII)가 된 웨일즈(Wales)의 왕자로부터 “왕의 보석상, 보석상의 왕(Jeweler to kings, king of jewelers)”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1902년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27개 티아라의 제작을 맡겨 까르띠에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갔다.

2년 후 에드워드 7세는 까르띠에를 최초로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 후 까르띠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시암(현 태국), 그리스, 세르비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집트, 알바니아 왕실과 오를레앙 일가, 모나코 공국으로부터 그와 비슷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 주얼리 공방(아뜰리에)
오늘날의 까르띠에를 만든 최고의 인물인 창업자의 손자 루이 까르띠에는 1924년 친구인 시인 장 꼭도(Jean Cocteau)를 위한 반지를 만들어 선물한다. 이후 까르띠에의 심볼이자 뮤즈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 걸친 절대적인 사랑을 받게 된다.

화이트골드, 옐로 골드, 핑크 골드 세 가지 색의 골드가 환상적인 하모니를 자아내 우아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반지 트리니티는 세 개의 밴드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최고의 우아함을 표현하는 까르띠에의 명작으로 삼색 골드가 상징하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고전주의와 미래지향주의 동시 만족
까르띠에에서 시계를 생산하게 된 것은 알프레드 까르띠에의 아들 루이 까르띠에에 의해서였다. 시계 디자인과 제조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루이는 까르띠에만의 보석 디자인과 세공을 응용해 벽시계, 탁상시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3년에는 최고의 예술미와 기술이 조화를 이룬 포르티코 미스터리 클락(Portico mystery clock)을 제작, 특허권을 따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시계 전문가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기술적인 완성을 더해오던 까르띠에는 뛰어난 시계 전문가인 모리스 코우(Maurice Couet)와 함께 미스터리 클락의 성능을 개발, 향상시켰다. 1907년 에드몬드 예거와의 공동작업으로 특허권을 딴 손목시계 버클은 시계 제조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다.

▲ 까르띠에 팬더 컬렉션의 제작 과정
까르띠에의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는 대부분 왕실, 귀족, 대부호를 위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최고의 디자이너, 시계 기술자, 감정사, 세공 전문가, 광택 전문가들의 손과 최상의 소재가 사용됐다. 이러한 엄격한 소재 선택과 완벽한 세공, 제조 기술은 현재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까르띠에는 여러 라인의 시계를 개발하여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중 새로이 선보인 발롱블루 드 까르띠에 워치는 ‘파란 공’이라는 뜻을 지니는 까르띠에의 새로운 야심작이다.

우주가 탄생되었던 그 순간부터의 공간의 팽창과 시간의 연속을 상징하는 발롱블루는 고전주의와 미래지향주의를 동시에 만족시키고 있다. 위쪽과 아래쪽이 라운드형을 띠면서 조약돌을 연상시키는 곡선의 볼륨감과 볼록한 양면이 강조된 케이스는 무중력상태를 연상시키듯 가볍고 친숙하게 손목을 감싸 안는 형태로 마치 손목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을 전한다.

카보숑 컷 사파이어로 장식된 크라운은 최초로 아치형의 고급메탈로 보호되는 형태를 띠며, 그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웅장한 면모를 과시한다.

또 까르띠에는 예술과 창작에 대한 까르띠에의 열정을 기념하며 까르띠에 아트 매거진(Cartier Art magazine)을 내놓는다. 이는 1년에 4번 발간되며 전국의 까르띠에 부띠끄에서 만나볼 수 있다.

▲ 하이주얼리 제작모습(1928년 제작된 마하라자 넥클리스의 복원 작업 모습)
럭셔리산업의 독보적 존재
1984년 설립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프랑스 국내외에서의 7개의 전시회, 30회를 넘긴 ‘방랑의 밤’, 250여 명의 예술가들의 900여 개의 컬렉션 등을 통해 독창적이고 유일한 후원 방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그 다양성과 현대 미술의 절충주의와 조화를 이루어가며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작가들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까르띠에 현대 미술 재단은 현대 미술을 널리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대중에게 프랑스 작가를 비롯한 세계적인 작가들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예술이 살아 숨쉬는 도시 파리의 장 누벨(Jean Nouvel)에 의해 유리와 스틸로 만들어진 빌딩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까르띠에는 럭셔리 산업, 특히 주얼리와 시계 산업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다 전 세계 300개가 넘는 부띠끄, 독자적인 유통망을 지닌 까르띠에는 까르띠에만의 노하우로 그 세계를 끊임없이 만들어가고 있다. 창조자로서의 까르띠에는 주얼리 메이킹을 예술의 영역으로 넓힌 동시에 현재는 전 세계에 단 7개의 브랜드만이 소유한 ‘제네바 마크’를 획득해 파인 워치 메이킹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펼치고 있다.

특히 까르띠에 코리아에서는 지난 2008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까르띠에 소장품전’을 개최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전 세계 7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까르띠에 메종’을 오픈하며 국내에서의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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