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는 색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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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색깔이 있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5.2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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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⑲ 길을 가다가

해질 무렵 풍경은 모두 그림 동산이니        落景無非畫苑
구름 저 끝엔 새빨간 연지를 발랐구나        雲頭抹過臙脂
샛노란 고목 물고기 머리뼈 같고             明黃老樹魚迂
연초록빛 먼 산은 부처 머리 닮았네          細綠遙山拂髭
연못 속 오리 날개 하얗고                    粉羽塘中右軍
밭두렁 위 순무 붉은 꽃 피었네               紫花塍上諸葛
석양에 서늘한 연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明滅寒煙夕陽
돌아가는 까마귀 나무 끝에 오똑하게 앉았네  歸鴉端坐烏勃
『아정유고 3』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시에는 색깔이 있는가. 당연히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색깔이 있는데 어떻게 시에 색깔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덕무는 말한다.

“글에는 색깔이 있는가. 『시경』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비단 저고리에는 엷은 덧저고리를 걸치고 비단 치마에는 엷은 덧치마를 걸치네’라거나 ‘검은 머리 구름 같아. 덧댄 머리 필요 없네’라는 시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색깔에 대한 백탑시사의 미학은 이덕무의 절친인 박제가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붉을 홍(紅) 한 글자만을 가지고 / 널리 눈에 가득 찬 꽃을 일컫지 말라 / 꽃수염도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으니 / 세심하게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하네.”

붉다는 한 가지 색깔로 세상 모든 꽃을 단정 짓지 말라는 박제가의 미학은 곧 이덕무의 미학이기도 하다.

자연과 사물에 대한 세심한 시선과 꼼꼼한 관찰과 정밀한 묘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덕무의 시에서는 색깔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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