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에 일본식 디플레이션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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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에 일본식 디플레이션은 오는가
  • 김윤태 기자
  • 승인 2014.01.1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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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저성장 국면 지속과 연 1%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장기화로 일본식 장기불황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은 경기가 침체되면서 물가 수준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전반적인 물가수준이 일시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락해 물가상승률이 0% 이하로 하락하는 ‘네거티브’ 인플레이션으로 정의한다. 실제 일본은 저성장과 저물가 국면이 수년간 이어지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져들었다.

▲ 한국에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일본에서와 같이 자산디플레이션이 시작하며 대차대조표 불황이 될 확률이 크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올 신년사에서 “지난 1년여간 물가상승률이 물가안정목표(2.5~3.5%)의 하한에 미치지 못했다”며 “경제성장 추세,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임금상승률 등의 변화 추이를 전망해 볼 때 우리 경제가 저물가나 디플레이션을 경험할 확률은 매우 낮다고 보는 것이 경험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했다. 금융시장 등에서 제기되고 있는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일축한 것이다.

김 총재는 최근의 낮은 물가상승률은 국제 원자재와 곡물가격의 하향 추세에 주로 기인하고 정부의 무상보육 등 제도환경의 변화도 부분적인 원인이라면서 “통화정책의 신뢰성을 유지하려면 경제 주체들에게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플레이션 가리키는 거시지표
그러나 각종 거시지표는 한국경제의 디플레이션 우려를 가리키고 있다. 201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3%에 그쳤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0.8%) 이후 14년 만에 최저치다. 물가 상승률은 2011년 3%대에서 2012년 하반기 1%대로 떨어진 후 10개월에 걸쳐 1%대를 유지하다 지난해 9월에는 0%대로 진입했다.

특히 2012년 6월 이후 19개월 연속 한국은행의 목표범위 하단인 2.5%를 하회하고 있다. 2013년 상승률은 전년도의 2.2%보다도 더 낮은 1.3%에 그쳐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을 제외한다면 소비자물가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65년 이래 최저치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분석실장은 “소비자물가의 상승률이 전례없이 둔화되고 있는 것은 경기둔화로 인해 총수요 측면에서의 상승압력이 낮기 때문만은 아니다”면서 “일부 정책효과 이외에 국제원자재 가격의 안정과 원화 강세로 인한 수입물가의 하락도 저물가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디플레이션의 사전적 정의가 물가수준의 절대적인 하락임을 감안할 때 1.3%라는 2013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디플레이션과 제법 거리가 있는 숫자다. 그러나 소비자물가가 1%를 상회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일축하는 것 또한 성급하다고 지적한다. 장기불황과 디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진 일본의 경우 자산버블이 붕괴되며 불황으로 접어든 것은 1991년이었지만 소비자물가의 절대 수준이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에 빠진 것은 1999년부터였다는 것이다.

임일섭 실장은 “1991년의 버블 붕괴 이후 성장률이 1%대에 그치는 불황이 지속되면서 소비자물가도 1% 내외의 상승률을 한동안 지속했다”면서 “저성장 또는 불황의 초기 국면에서 수년간 1% 내외의 물가상승률을 보이다가 점차 낮아지면서 본격적인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물가상승률이 아직 1%를 상회한다는 이유로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향후 물가와 성장률 등의 움직임이 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나금융연구소도 보고서를 통해 디플레이션 취약성 지수(Deflation Vulnerability Index)로 디플레이션 위험도를 축정한 결과 2013년 2분기 현재 우리나라의 디플레이션 위험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1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주장했다. 성장률 하락, 민간신용 및 통화량 증가율의 둔화 그리고 원화가치 상승이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일섭 실장은 한국에서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세 가지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총수요부진, 주택 가격 침체, 대규모 가계부채 등이다. 고령화에 따른 주택 가격 하락과 대규모의 가계부채로 총수요 전망도 밝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일본에서와 같이 자산디플레이션이 시작하며 대차대조표 불황이 될 확률이 크다는 게 임 실장의 주장이다.

그는 “주택 버블이 일본과 달리 크지 않다는 평가도 있어 일본과 같은 과격한 디플레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면서도 “반면에 일본과는 달리 가계가 주택구입에 따른 대규모 부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디플레의 고통이 더 클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 “물가상승률이 낮게 유지되면 가계의 부채부담이 줄지 않는다”며 “이때 주택 매도를 통해 부채규모를 줄이기 시작하면 자산 디플레가 촉발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장기 디플레이션은 일본의 경험이 유일
역사적으로 디플레이션의 발생 사례는 많지 않다.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 이후 장기적인 디플레이션은 1990년대 말 일본의 경험이 유일하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저물가와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되면서 만성화된 장기디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다. 1997년 일시적으로 물가상승압력이 커지기도 했지만 일본경제는 1990년 이후 장기적으로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국면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버블 붕괴 및 엔고에 따른 순환경기의 하락뿐만 아니라 고령화 등 구조적인 내수저하 요인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1991년 일본은 버블붕괴 이후 부동산 및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기업과 금융부문의 부실이 확산되었고, 이에 따른 소비와 투자부진으로 생산과 고용이 위축되고 다시 수요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장기간 지속됐다. 1980년대 호황기에 고성장을 기대하면서 크게 확대되었던 기업투자는 경제 내의 만성적인 공급과잉요인이 되면서 물가하락압력을 가중시킨 것이다.

특히 일본은 디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만성적으로 경기활력이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 및 금융기관의 수익성 저하와 부도 등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즉 저물가 등으로 부실채권처리가 지연되고 저금리로 수익성이 나빠지면서 1990년대 말부터 일본의 대형 보험회사, 증권사, 은행의 부도가 증가한 것이다.

또한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업률이 급등하고 정부부채 규모가 크게 증가하는 등 경기부진 요소가 만성화 또는 구조화되는 현상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1991년 2% 초반대에 머물던 실업률이 디플레이션 지속과 함께 2002년 5.3%까지 급등해 민간의소득 및 소비부진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민간소득 정체 등에 의한 세수부족, 경기부양 및 구조조정 비용 등의 급등은 재정적자를 급격하게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이로 인해 정부부채의 대GDP비율은 2013년 현재 243%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고령화 등의 구조적 내수저하 요인과 결합해 새로운 소비패턴을 생성시키고 있으며, 부동산과 금융자산 등 금융부문을 통해서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디플레이션과 더불어 저출산 고령화가 급격하게 진전되면서 저축 및 소비성향도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했으며 최근에는 신소비층이 등장하면서 소비패턴이 중장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디플레이션 및 고령화의 진전으로 금융시장에서는 위험회피 성향이 강화돼 해당 자산의 수요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디플레이션 심리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일본의 실패, 반면교사 삼아야
한국경제가 이처럼 일본과 같은 장기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데에는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들이 강하다. 저성장 고착화와 인구 고령화, 원자재 가격 안정 등으로 저물가 장기화 가능성은 높지만 일본식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한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경기흐름상 물가가 성장을 다소 후행하고 있다는 속성을 감안하면 국내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상회하기 시작할 경우 디플레이션 위험이 크게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국내외 주요기관의 2014년 국내성장률 전망치는 대부분 잠재성장률(3% 중후반으로 추정)에 근접하거나 소폭 상회하는 수준이다.

다만 글로벌 경제에 잠재해 있는 ‘불확실성 요소’ 또는 위험요인들로 인해 경기회복이 꺾일 경우 국내에서의 ‘장기디플레이션 국면’은 더욱 뚜렷하게 진행될 가능성은 남아있다. 올해에는 미국의 출구전략, 중국의 성장둔화, 일본의 아베노믹스, 국내 가계부채 및 부동산 경기 부진 등이 불확실성 요소로서 성장을 제약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요부문과 경제구조 등을 비교할 때 한국경제가 일본식 ‘장기디플레이션’에 진입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시점이지만 디플레이션에 대한 경계감은 상당 기간 지속돼야 할 것이라는 게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의 판단이다.

하나금융연구소도 대체로 상이한 전망이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범위(2.5~3.5%)를 하회하는 저물가가 당분간은 지속될 전망이다.

또 저성장 고착화와 인구 고령화 등으로 총수요 측면의 인플레 압력 완화가 지속될 것이며, 중국의 성장 모델 변경 및 성장둔화와 미국의 출구전략 등으로 국제 원자재 가격도 안정세가 예상되고 있다.

집중호우 등의 기상이변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전체 물가에 미칠 영향역이 크지 않고 일시적인 충격에 그칠 전망이라는 근거에서다.

또 일본에 비해 자산버블의 규모가 작고 경제주체의 기대심리도 디플레이션보다는 인플레이션에 치중되어 있다고 하나금융연구소는 분석했다. 여기에 통화 및 재정정책의 여력이 높아 정책당국이 디플레이션 압력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저성장·저물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일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경고는 재차 강조한다. 국내 경제가 일본식 디플레이션에 진입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총수요 압력 둔화로 인한 저물가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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