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피해 돌아가며 어리석음 반쯤 보완하고 秪把全迂補半癡
다른 사람 좇아 억지로 어울리는 것 부끄럽네 隨人恥做強淋漓
세상 좇아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 너무나 재미없고 太無滋味推移厭
이름 세워 전하려고 하나 이루기 쉽지 않네 差欲流芳樹立遲
좋은 친구 만나 속마음 툭 털어놓고 佳友倘逢輸肺腑
이름 높은 현인 상상하니 눈앞에 떠오르네 名賢劇想現須眉
나의 행동거지 푸른 하늘에 내맡긴 채 靑天管領吾行止
세상사 마음에 어긋나도 순응하며 지내리라 事到違心順遣之
『아정유고 2』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조원은 이 시를 보면 비록 이덕무를 보지 않았지만 그의 인품(人品), 곧 그 뜻과 기운을 상상해볼 수 있다고 비평했다.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서 “형상 밖의 아득하고 어렴풋한 것과 가슴속에 쌓인 기운을 마음으로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말과 글로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덕무는 어떻게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나는 ‘섬세한 시선과 꼼꼼한 관찰’이다. 그렇게 하면 형상 밖의 아득하고 어렴풋한 것과 가슴속에 쌓인 기운의 실체가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의 선택과 감각적인 필치’다. 시적 언어의 선택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는 작업이다.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기 때문에 직관과 감각을 통한 시적 언어의 선택이야말로 시작(詩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