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② 고증학·금석학·역사학의 독보적 권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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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② 고증학·금석학·역사학의 독보적 권위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0.3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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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㉑
▲ 추사 김정희 초상화

[한정주=역사평론가] 오늘날 김정희를 대표하는 호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추사(秋史)’는 역설적이게도 그 연원과 뜻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기록이 없다.

반면 완당(阮堂)이라는 호는 김정희가 스승으로 섬겼던 청나라의 대학자 완원(阮元)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사실은-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추사(秋史)라는 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한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

여기에서는 김정희가 평생 343개의 명호(名號)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다시 1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추사, 명호처럼 살다』의 저자 최준호씨의 학설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앞선 의문의 해답을 찾아나가려고 한다. 최준호씨의 학설은 ‘추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 부여해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준호씨는 무엇보다 먼저 ‘추(秋)’와 ‘사(史)’라는 글자의 뜻과 의미부터 고찰한다. 그는 ‘추(秋)’라는 한자를 해석하면서 “추에는 ‘가을’, ‘훨훨 날아오르는 모양’, ‘추상(秋霜)같다’, ‘오행(五行) 중 금(金)을 의미한다’ 등의 뜻이 있다.

필자는 이 중에서 ‘추상같다’를 추의 직접적인 의미로 보았고 ‘오행 중 금을 의미한다’를 추의 간접적인 의미로 보았다.

추의 직·간접적인 의미를 보충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먼저 ‘추상같다’는 ‘가을 서리같이 엄정하다’란 의미로, 곧 ‘엄정함’ 또는 ‘준엄함’에 비유되는 말이다. 다음 ‘오행 중 금을 의미한다’는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금·수·목·화·토) 중 금(金)을 이른다는 말이다.

이렇듯 추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두 의미 중 추의 간접적인 의미인 ‘오행 중 금을 의미한다’가 명호 추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아울러 이 의미는 추사의 사를 풀이할 때 보조 수식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를 종합해 추사의 추를 ‘추상같다’로 풀이하고, 그 내면에 ‘오행 중 금을 의미한다’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았다.”(『추사, 명호처럼 살다』, 아미재, 2012. P94∼95)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사(史)’라는 글자에 대해서는 “사에는 ‘사관(史官)’, ‘문장가(文章家)’, 서화가(書畵家) 등의 뜻이 있다. ‘사관’은 역사의 편찬을 맡아 초고(草稿)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고, ‘문장가’는 글을 뛰어나게 잘 짓는 사람이며, ‘서화가’는 글씨와 그림에 능한 사람이다. 필자는 이 중에서 추사의 사에 가장 적합한 의미로 ‘서화가’를 꼽았다. 이때 추와 사 두 글자는 상호 보완 작용을 한다. 곧 추의 간접적인 의미 ‘오행 중 금을 의미한다’가 사의 의미 ‘서화가’를 보조 수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추사의 사를 ‘금석서화가’로 풀이했다.”(『추사, 명호처럼 살다』, 아미재, 2012. P94)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추(秋)와 사(史)라는 글자에 대해 뜻을 분석하고 의미를 고찰한 것을 바탕 삼아 최준호씨는 ‘추사(秋史)’의 총체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추사(秋史)는 추상(秋霜)같이 엄정한 금석서화가(金石書畵家)란 의미로 자신을 이른 명호이다. 추사는 가을 서리같이 엄정한 금석학자이자 서화가란 의미이다.”

최준호씨 주장과 학설에 따르면 ‘추사(秋史)’라는 호에는 금석서화가, 즉 금석학자이자 서화가였던 김정희가 새겨져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추사라는 호에 ‘금석학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서화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 논문집 『해동비고(海東碑攷)』

필자가 볼 때 추사는 ‘금석서화가’보다는 ‘금석역사가’로 해석해야 한다. 먼저 필자는 ‘추상(秋霜) 같다’에서 ‘추(秋)’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보다 ‘추(秋)’는 ‘춘추(春秋)’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춘추는 공자가 쓴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편년체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연원한 말이다. 현존하는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서가 다름 아닌 『춘추』다. 따라서 유학에서 춘추는 역사와 같은 뜻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금석학은 고동기(古銅器)나 비석(碑石)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실증과 고증, 해독과 해석의 방법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고고학과 역사학의 한 분야다. 즉 금석학은 곧 역사학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김정희가 추사라는 호를 처음 사용한 시기만 보더라도 여기에는 서화가 김정희보다는 역사가 김정희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된 때는 김정희의 생애를 살펴볼 때 중년 이후부터 였다고 한다면 금석역사가 김정희의 모습은 추사라는 호를 처음 사용했던 시기와 거의 정확하게 겹쳐져 있다.

최준호씨는 김정희가 ‘추사’라는 호를 처음 사용했던 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추사 바로 전에 썼던 명호가 현란(玄蘭)이다. 즉, 김정희는 최소한 1808년(23세) 여름에서 1809년(24세) 중국 연경에 가기 얼마 전까지 현란을 사용하다가 추사로 바꾸었다.”(『추사, 명호처럼 살다』, 아미재, 2012. P87)

그런데 이 시기, 즉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걸쳐 김정희는 금석역사가로서의 재능과 역량을 한껏 과시했다. 즉 김정희는 서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훨씬 이전에 이미 금석역사가로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금석학은 청나라에 들어와 등장한 신학문인 고증학으로 인해 크게 번성했다. 고증학은 명나라 때 유행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고담준론에 반발해 학문 연구의 방법을 실증(實證)과 고증(考證)과 변증(辨證)에서 찾았다.

고증학의 이러한 학문 연구 방법은 문헌과 기록이 적어 그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어려워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 역사의 비밀과 수수께끼를 금석(金石: 고동기나 비석)에 남겨진 명문을 찾아 실증하고 고증하며 해석하는 금석학에 꼭 들어맞았다.

유홍준 교수의 말을 빌려보면 “추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였고 “이 분야에 관한 한 추사는 전무후무한 권위”였다. 다시 말해 김정희에게 고증학과 금석학은 동일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연구 방법과 금석학은 고대사의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구체적인 예는 ‘한양 북한산의 비봉과 함경도 함흥 함초령의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김정희의 고증과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고증학과 금석학과 역사학은 마치 하나의 학문처럼 융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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