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을 일으킬 아이와 집안을 망칠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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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을 일으킬 아이와 집안을 망칠 아이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9.01.15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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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㊺
▲ 석분이 자식을 가르치고 있는 청나라 시절 그림.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㊺

[한정주=역사평론가] 成家之兒(성가지아)는 惜糞如金(석분여금)하고 敗家之兒(패가지아)는 用金如糞(용금여분)이니라.

(집안을 일으킬 아이는 똥오줌도 마치 황금처럼 아끼지만, 집안을 망칠 아이는 황금도 마치 똥오줌처럼 쓴다.)

옛 기록과 문헌을 뒤적여보면 아무리 부유한 집안이라고 해도 자식 교육을 잘못해서 하루아침에 비렁뱅이 신세로 전락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재물에는 원래 정해진 주인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있으면 산더미처럼 쌓이는 게 재물이지만 반대로 능력이 없으면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지는 게 또한 재물이다. “부자 삼대(三代) 못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큰 부자로 자식을 잘 가르친 집안을 들자면 ‘만석군 석분’의 집안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석분은 재물로 치자면 ‘만석군’이라는 용어가 부자를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될 만큼 큰 재물을 모았지만 항상 공손함과 겸손함과 신중함을 지니도록 자식들을 가르쳤다.

공손하고 겸손하고 신중하다는 것은 오만하거나 교만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한데 오만하거나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재물을 제멋대로 낭비하겠는가. 따라서 근검절약을 가르치는 것보다 공손함과 겸손함을 가르치는 것이 재물을 지키고 집안을 유지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비결이라고 하겠다.

석분은 자식들이 잘못을 하면 전혀 꾸짖지 않고 그저 음식을 먹지 않은 채 방에 앉아서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다. 자식들이 서로 꾸짖고 반성한 다음 그중 나이 많은 자식이 윗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낸 채 석분에게 잘못을 사죄하고 고치면 용서했다.

특히 자식들이 부와 권세에 취하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항상 경계했던 석분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사마광이 자신의 자식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가범』에 온전히 기록되어 있다.

석분이 능리로 거처를 옮긴 후 어느 날 내사(內史)의 관직에 있던 막내아들 석경이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의 외문(外門)에 이르러서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는 일이 있었다.

석경의 일을 들은 석분은 그 즉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석경이 두려워하며 윗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낸 채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석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맏아들 석건을 비롯해 온 집안사람들이 윗옷을 벗고 어깨를 드러내 용서를 빌자 그때서야 석분은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사(內史)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직위에 있는 존귀한 사람이다. 내사가 마을 문으로 들어서면 마을의 장로(長老)들조차 모두 두려운 마음에 달아나 몸을 숨긴다. 세상인심이 이러하니 존귀한 내사가 수레 안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석분의 말에는 공손함과 겸손함과 신중함을 잃어버리고 오만하고 교만하게 굴었던 막내아들 석경의 잘못된 행동과 마음을 간접적으로 크게 꾸짖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석분의 자식과 집안사람들은 더욱 공손하고 겸손하며 신중하게 행동했다. 특히 마을 안으로 들어설 때는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서 잰걸음으로 걸어서 집에 이르렀다.

석분의 엄한 자식 교육 덕분에 큰 깨우침을 얻은 석경은 훗날 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석경이 승상으로 있을 때 그 집안 자손이 모두 관리가 되고 녹봉이 2000석에 오른 사람만 해도 무려 열세 명에 달했다고 한다.

석분과 그의 네 아들의 녹봉이 모두 합쳐 1만석이었는데, 그 자식 대에 이르러서는 무려 2만6000석으로까지 불어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된 자식 교육보다 더 재물을 늘리고 집안을 크게 일으키는 비결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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