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저지에 한국의 종군위안부 기념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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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에 한국의 종군위안부 기념비 건립
  • 조선희 기자
  • 승인 2013.11.2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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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화가 스티븐 카발로씨

 

▲ 스티븐 카발로씨는 지난해 10월23일 그가 직접 디자인한 종군위안부 기념비를 미국 뉴저지 팰리사이드 팍 257 2nd Street에 건립했다.

“아직 생존하고 계시는 종군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이 비극을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비극의 피해자들은 그들이 겪었던 아픈 기억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제가 그분들과 함께하고 느낀 것입니다”

미국 뉴저지에 거주하는 한 벽안(碧眼)의 화가가 우리의 민족적 비극인 종군위안부 문제를 예술적으로 승화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 전시하고 더 나아가 최근에는 미국 뉴저지에 직접 본인이 디자인한 한국의 종군위안부 기념비 건립을 주도하는 등 미국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스티븐 카발로(Steven Cavallo)씨다. 스티븐 카발로씨는 지난해 10월23일 그가 직접 디자인한 종군위안부 기념비를 미국 뉴저지 팰리사이드 팍 257 2nd Street에 건립했다. 기념비 앞에는 전쟁의 희생양이 된 종군위안부 여성들을 추모하는 새로운 꽃다발이 놓여져 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도왔습니다. 특히 Korean American Voters Council (KAVC, 한미선거자문위원회)와 팰리사이드 팍(Palisades Park) 제임스 로턴도(James Rotundo) 시장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기념비 건립비용은 대략 $2000 정도 됐어요. 지역 식당들이 리셉션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 주시고 기금 모금자를 통해 건립비를 마련해 주셨지요. 모두가 한 몸이 되어서 움직인 결과입니다. 캘리포니아 쪽에서 한 지인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 앞으로 LA에도 기념비를 건립할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기념비 건립에 반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념비 반대자 중 어떤 이는 제게 ‘종군 위안부 얘기는 단지 역사 일문의 각주일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고 말을 하기도 했지요.”

알수록 더 알아가야만 하는 종군위안부 문제
그는 “제가 처음으로 한국의 종군위안부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지난 1992년 어린이동화를 그리면서 우연히 강제수용소 그림을 스케치하는 작업 중에 옆집에 살던 한국인 이웃을 통해서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종군위안부 같은 잔혹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저한테는 매우 충격적이었죠”라고 말했다.

스티븐 카발로씨가 당시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종군위안부’ 사실 자체를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역사수업 등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주변에서 들어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한국의 종군위안부는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고 그의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이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스티븐 카발로 씨는 “저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더 알기 위해 한국 김다실 선생님의 <침묵의 소리>(1999년)라는 책을 구해 읽었습니다. 이 책은 과거의 위안부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책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김다실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종군위안부에 관한 그분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는데 김 선생님의 책과 말씀은 그 후 제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토대가 되었습니다”라고 술회했다.

그는 “김 선생님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필름을 저에게 많이 넘겨주셨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셨죠. 팰리사이드 팍(Palisades Park) 도서관에서 필름 상영회를 통해 저는 이 비극적이고도 역사적인 사실을 더 생생히 알 수 있었고 저에게는 많은 용기와 힘을 주셨어요. 아마도 선생님의 도움 없이는 저의 프로젝트가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기 위해 홀로코스트, 일본 강제 수용소, 종군 위안부 여성 등을 그만의 수채화로 표현 했는데 <the Kent State Shooting, and Kim Phuc fleaing from the Napalm attack in Vietnam> 등의 작품을 그렸다. 당시 한국의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표현하고 싶어 <Once I was Beautiful>, <Once I was warm>, 그리고 <Once I had dreams>라는 어두운 시리즈를 연이어 발표하게 된다.

스티븐 카발로씨는 “제가 남긴 이 시리즈 중에 어둠 속에 웅크려 있는 여성들의 모습, 일본 마스크를 벗은 한 여인의 모습이 있는데, 이 그림은 그 당시 모든 한국사람들이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이름을 강제로 만들어야 했고, 일본어로 대화해야만 했으며 만약 한국말을 사용할 경우에 일본인들로부터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는 비극적 현실을 형상화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티븐 카발로씨는 직접 한국에 입국해 생존해 계시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때 상황을 직접 듣게 된다. 그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말씀하실 때는 몸을 심하게 부들부들 떠시는 할머니도 계셨지요. 하지만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 하는 할머니는 한분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했을 때 대략 20명 남짓 되는 어린 일본 학생이 단체로 나눔에 집을 방문했었는데 제 생각에는 많은 일본 사람들, 특히 어린 2세들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현 일본 기성세대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스티븐 카발로씨는 “미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위안부 여성들이 군인들로부터 강제로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본인 의사로 몸을 판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분한테 이렇게 말했죠. ‘만약 당신이 피해자 여성들과 얼굴을 맞대고 그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강제로 성폭행을 당해 피해본 사람들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응수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말했다.

스티븐 카발로씨는 올해 한국의 광복절에 맞춰 뉴욕 퀸즈에 있는 한 대학 초청으로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장소는 퀸즈 커뮤니티 대학 홀로코스트센터다. 그전에 잉글우드 뉴저지에 있는 예술공연센터(Performing Arts Center)인 버겐 팩에서 5월에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으며 지난 2월 뉴욕 플러싱에 있는 갤러리 예감에서는 같은 주제로 전시회를 했다. 기존에는 수채화 작업을 했으나, 마지막 2월 전시에서는 유화작품을 선보였고, 좋은 호평이 있었다. 앞으로도 종군위안부에 관한 작품을 뮤지엄과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할 계획이다.

 

▲ 스티븐 카발로씨의 아내는 춘천이 고향인 한국 여성이다.

내 작품의 가장 큰 영향은 한국인 아내 덕
스티븐 카발로씨의 아내는 사실 춘천이 고향인 한국 여성이다.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익숙하고 함께 일하는 작가의 대부분은 한국인들이다. 그가 함께하는 많은 모임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은 한국 사람일 정도다. 그는 “나는 한국음식 마니아입니다. 특히 아내가 해주는 한국음식은 기가 막히지요. 특히 비빔밥과 갈비, 삼겹살, 잡채 등을 좋아합니다. 한국의 아리랑 같은 전통음악은 왠지 가락이 애잔하고 섬세하여 가끔 듣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 혼자만이 오로지 한국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은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떠한 배경도 보지 않게 되고 우리 모두는 예술가이며 친구라는 생각입니다. 예술은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합니다. 나의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는 나의 아내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품을 하기 전과 하는 동안에도 많은 것들을 의논합니다. 또한 나의 아내는 수많은 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한국에 대한 영향으로 이보다 더 큰 영향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티븐 카발로씨는 1956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고 현재 한국인 아내와 슬하에 줄리아와 혜지 두 딸을 두고 있다. 그는 뉴욕 맨하탄에 있는 시각 예술 학교와 SVA(School of Visual Art)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으며 위대한 예술가인 톰 댈리(Tom Daly)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1970~90년대는 상업 예술가로 일을 하다가 1999년 상업예술이 퇴화되기 시작하면서 정식 예술가로 전환한다. 1997년 앤드류 장 교수와 황란씨를 만나게 되면서 한국 예술가들을 도와주기 시작했고, 현재는 팰리사이드 팍(Palisades Park) 도서관 안에 있는 한 갤러리의 큐레이터와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수많은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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