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항아리는 막아도 사람의 입은 막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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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빠진 항아리는 막아도 사람의 입은 막기 어렵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12.2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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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㊳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㊳

[한정주=역사평론가] 寧塞無底缸(영생무저항)이언정 難塞鼻下橫(난색비하횡)이니라.

(차라리 밑 빠진 항아리는 막을 수 있지만 코밑에 가로놓인 입은 막기 어렵다.)

『명심보감』의 이번 경구는 입은 막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말은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한 말을 ‘삼키지 않겠다’고 한 상(은)나라 탕왕과 더불어 신하들이 한 거짓말을 너무 많이 ‘먹었다’고 한 노나라 애공(哀公)의 사례를 통해 말이란 반드시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참된 뜻에 대해 살펴보자.

『서경』 중 상나라의 문헌과 기록을 모아 엮은 <상서(尙書)> 편에 보면 ‘탕서(湯誓)’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이 글은 ‘탕왕의 맹서’라는 뜻으로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정벌하러 군사를 동원하면서 자신에게 천하의 민심을 모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 글 가운데 “朕不食言(짐불식언) 爾不從誓言(이불종서언) 予則孥戮汝(여즉노륙여) 罔有攸赦(망유유사)”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결코 식언(食言)을 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내가 맹서한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들을 처자식과 함께 죽일 것이다. 용서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흔히 거짓말 혹은 헛된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식언(食言)’은 바로 여기 탕왕의 글에 최초로 등장하는 단어이다. ‘식언’은 의역을 하면 거짓말 혹은 헛된 말이지만 직역을 하면 “말을 먹는다 혹은 삼킨다”는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입 속에 삼켜버린다는 것으로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가 지은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에 좌구명(左丘明)이 주석과 해설을 덧붙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 25년조’를 보면 다시 한 번 ‘식언(食言)’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애공이 월나라에서 돌아오자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季康子)와 맹무백(孟武伯)이 오오(五梧)라는 곳까지 나가 맞이했다. 그런데 애공의 수레를 몰고 있던 곽중(郭重)이 먼저 계강자와 맹무백을 보고 애공에게 “저 두 사람은 평소 임금님에 대해 나쁜 말을 많이 합니다. 임금님께서도 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십시오”라고 진언했다.

애공이 오오에서 술잔치를 베풀자 맹무백이 애공의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리면서 곽중을 향해 “왜 그렇게 살이 쪘는가?”라며 크게 꾸짖었다. 이 순간 계강자가 앞으로 나서서 맹무백에게 벌주(罰酒)를 내리라고 애공에게 청했다.

자신들은 나라를 지키느라 애공을 따르지 못하는 죄를 지었는데 애공을 모시고 멀고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곽중에게 살이 쪘다고 꾸짖는 것은 큰 잘못이기 때문에 벌주를 내리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계강자의 말을 듣고 있던 애공은 뼈 있는 말을 한 마디 했다. “是食言多矣(시식언다의) 能無肥乎(능무비호)”, 해석하자면 “그것은 식언(食言)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오. 어찌 살이 찌지 않을 수 있겠소?”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곽중이 살이 찐 까닭은 계강자와 맹무백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애공 자신이나 또는 곽중에게 하는 ‘식언’, 즉 거짓말과 헛된 말을-혹은 대신해서 혹은 직접적으로-많이 먹었기 때문이라는 은미한 뜻이 담겨 있었다.

다시 말해 계강자와 맹무백 등이 마치 애공을 위하는 충신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식언이나 일삼아 애공을 속이는 간신이자 권신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서 일까. 『춘추좌씨전』은 이날의 술잔치에 대해 전혀 즐겁지 않았고 오히려 이후 애공과 계강자나 맹무백를 비롯한 대부들 사이에는 악감정만 남게 되었다고 비평했다.

그렇다면 애공과 이들은 장차 어떻게 되었을까? 애공 당시 노나라의 실권은 계강자의 계손씨(季孫氏)와 맹무백의 맹손씨(孟孫氏) 그리고 숙손씨(叔孫氏)가 함께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예전 노나라의 임금이었던 환공(桓公)의 후손이어서 대개 ‘삼환씨(三桓氏)’라고 불렸다.

이날의 술잔치 이후 애공은 월나라의 도움을 받아 이들 삼환씨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유산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애공의 비참한 최후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를 믿지 못해 식언을 일삼고 거기에다가 말속에 뼈를 담아 비방하고 공격했던 오오의 술잔치가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말을 참지 못해 빚어진 재앙’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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