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은 거울처럼 밝지만 다가올 일은 칠흑처럼 어둡다”
상태바
“지나간 일은 거울처럼 밝지만 다가올 일은 칠흑처럼 어둡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10.02 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⑩
▲ 주나라를 개국한 무왕(왼쪽)과 책사 강태공.

[명심보감 인문학] 제11강 성심편(省心篇) 상(上)…마음을 살펴라⑩

[한정주=역사평론가] 過去事(과거사)는 明如鏡(명여경)이요 未來事(미래사)는 暗似漆(암사칠)이니라.

(과거의 일은 밝기가 거울과 같고, 미래의 일은 어둡기가 칠흑과 같다.)

과거의 일에 밝은 덕분에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도 미래의 일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이른바 ‘복서(卜筮)’, 즉 점을 치고 점괘를 보아 앞날을 예측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사람의 능력으로 다가올 앞날의 일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3000년 전 공자가 살던 시대나 오늘날에나 ‘복서’에 의존하는 사람의 심리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고대 복서가(卜筮家)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사마천의 『사기』 <귀책열전(龜策列傳)>을 읽어보면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옛 사람들은 ‘점괘를 보되 점괘에만 의존해 일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다.

먼저 사마천은 점괘 그대로 실제 길흉의 징조와 응험이 나타난 역사적 사례를 열거한다. 다시 말해 주나라의 주공은 삼귀(三龜)로 점을 쳐서 무왕의 병이 완쾌되도록 했고, 포악무도한 은나라의 주왕은 길하다는 점괘를 얻으려고 원귀(元龜)로 점을 쳤지만 뜻하던 결과를 얻지 못해 멸망에 이르렀고, 진(晉)나라의 헌공은 여희의 미모를 탐해 점을 치자 구설수에 오를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는데 그 재앙이 무려 다섯 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초나라 영왕(靈王)은 주나라 왕실을 배반하려고 거북점을 치자 그 조짐이 불길하다고 나왔는데, 결국 건계(乾谿) 전투에서 패배하고 달아났다가 목을 매고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까닭에 예로부터 군자는 “복서를 가볍게 생각하고 신명을 믿지 않는 사람은 도리에 어긋난 사람으로 여겼다”고 사마천은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 오직 점괘의 상서로움만 믿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귀신도 결코 바르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경고를 잊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점괘가 아무리 길하고 상서롭다고 해도 도리를 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점괘의 신통함도 어찌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사마천은 점괘만으로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내다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서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옛 성군과 현인들도 의심스러운 일과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오모(五謀)’, 즉 다섯 가지 방법으로 살피고 헤아려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다섯 가지 방법이란 첫째 자신의 생각, 둘째 신하, 셋째 백성, 넷째 복(卜), 다섯째 서(筮) 등이다. 이 경우 ‘복(卜)’이란 거북점을 말하고, ‘서(筮)’란 시초점을 말한다.

어쨌든 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 점을 쳐서 많은 쪽을 따랐다는 것이다. 즉 복서는 다섯 가지 방법 중 두 가지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옛 성군과 현인들이 이렇게 한 까닭을 “오로지 복서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역설했다.

실제 그들이 복서의 점괘에만 의지해 중대사를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나라를 개국한 무왕과 책사 강태공의 고사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를 읽어보면 무왕이 폭군 주왕을 정벌하러 군대를 동원할 때 거북점을 쳤는데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때마침 심한 비바람까지 몰아쳐서 천명(天命: 하늘의 뜻)이 아직 무왕에게 옮겨오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이에 무왕을 비롯해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신하들과 장군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군사 동원을 머뭇거리며 주저했다. 이때 유독 강태공만은 무왕에게 강력하게 군사 동원을 권했고 마침내 무왕은 전쟁터로 나서 목야(牧野)에서 주왕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끝까지 주왕의 뒤를 쫓아가 목을 베었다.

만약 당시 문왕이 거북점에만 의존해 군대를 철수시켰다면 은나라와 주나라의 운명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강태공은 왜 거북점은 물론 비바람 등 자연현상까지 불길한 조짐을 보였음에도 주왕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일까? 그는 이미 신하와 장군과 군사들이 무왕에게 전적으로 복종하고 있고, 주왕의 포악무도한 행각에 질릴 대로 질린 백성의 마음이 무왕에게로 돌아섰고, 군대는 잘 훈련되고 정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강태공은 거북점이 아무리 불길하다고 해도 이미 대세를 판가름할 정도로 상황이 무르익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단지 점괘만 보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옛 성군과 현인에게는 아무리 점괘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일을 결정할 때 고려할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할 뿐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