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아버지와 형·엄한 스승과 친구 없이 성공한 사람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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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아버지와 형·엄한 스승과 친구 없이 성공한 사람 드물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9.0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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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10강 훈자편(訓子篇)…자식을 가르쳐라⑤

[한정주=역사평론가] 呂滎公曰(여형공왈) 內無賢父兄(내무현부형)하고 外無嚴師友(외무엄사우)요 而能有成者鮮矣(이능유성자선의)니라.

(여형공이 말하였다. “집 안에는 현명한 아버지와 형이 없고, 집 밖에는 엄한 스승과 친구가 없으면서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여기 여형공의 말은 『명심보감』의 엮은이가 『소학』 <선행(善行)> 편에 실려 있는 ‘여형공의 고사(故事)’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형공은 이름이 희철(希哲)로 형공은 봉호(封號)이다.

여형공은 북송 제6대 황제 신종 때의 대신 신국정헌공(申國正獻公) 여공저(呂公著)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여공저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정치가였던 사마광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을 만큼 학식이 뛰어났고 인품이 출중했다.

특히 여공저는 집안에서 여형공을 비롯한 자식들을 대할 때 사소한 일에 얽매여 전전긍긍하지 않고, 행동은 무게가 있고, 태도는 엄격하며, 말은 조심해 삼가고, 세상사와 재물에 대해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여형공의 어머니인 신국부인(申國夫人)은 성품이 엄격하고 몸가짐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 그녀는 맏아들인 여형공을 매우 사랑했다. 그러나 여형공을 가르칠 때만은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예절과 법도에 맞게 행동하도록 했다.

이러한 부모의 가르침 때문에 여형공은 겨우 10세 무렵이었을 때부터 아무리 춥고 더워도 또는 눈비가 내리는 날에도 하루 종일 부모를 모시고 서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부모가 앉아도 된다는 말을 하기 전에는 감히 앉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에 있어도 항상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집 밖에 나가서는 찻집이나 술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고 저잣거리의 천한 말이나 사악한 음악은 듣지 않고 단 한 번도 사특한 글은 읽지 않고 예절과 법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행동은 아예 하지 않았다.

여공저가 영주에서 통판(通判) 벼슬을 할 때 때마침 -앞서 필자가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는- 대학자이자 명문장가인 구양수가 지주사(知州事)로 있었다.

당시 초천지(焦千之)라는 사람이 구양수의 처소에 식객으로 와 있었는데, 그는 몸가짐이 엄숙하고 성품이 강직한 데다가 행동은 반듯하고 정의로웠다. 그래서 여공저는 초천지를 자신의 집으로 초빙해 여형공을 비롯해 모든 자식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여형공의 나이 겨우 10세였습니다.

그런데 초천지는 여형공과 그의 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거나 예절과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단정히 앉아서 부른 다음 마주 앉게 하고선 하루해가 저물고 밤이 새도록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두려워하며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벌을 달게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얼굴빛을 누그러뜨리고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가르쳤다.

이렇듯 여형공은 이미 10세 무렵부터 집 안으로는 현명한 아버지 여공저와 어머니 신국부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집 밖으로는 엄격한 스승 초천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여형공의 덕행과 재능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형공은 장성한 다음 자신이 뜻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현명한 부모와 엄격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 안에는 현명한 아버지와 형이 없고, 집 밖에는 엄한 스승과 친구가 없으면서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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