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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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5.1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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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3강 순명편(順命篇)…운명에 순응하라⑤
▲ 기원전 400년을 전후해 정(鄭)나라의 포(圃) 땅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열자. 기원전 500년을 전후해 활동한 또 다른 도가사상가인 노자보다는 시대적으로 뒤지고 기원전 370년에서 기원전 280년경을 살았던 장자보다는 시대적으로 약간 앞선 인물이다.

[명심보감 인문학] 제3강 순명편(順命篇)…운명에 순응하라⑤

[한정주=역사평론가] 列子曰(열자왈) 痴聾瘖啞(치롱음아)도 家豪富(가호부)요 智慧聰明(지혜총명)도 却受貧(각수빈)이라 年月日時(연월일시)가 該載定(해재정)하니 算來由命不由人(산래유명불유인)이니라.
(열자가 말하였다. “어리석은 사람과 귀머거리와 고질병이 있는 사람과 벙어리라고 해도 집은 부유하고 권세가 있는 부자일 수 있고,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오히려 가난을 감수하며 살 수 있다. 해와 달과 날짜와 시간은 모두 분명하게 정해져 있으니 살펴보면 그것은 운명에 달려 있지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열자(列子)』라는 책은 『노자(老子)』, 『장자(莊子)』와 함께 도가사상의 3대 경전으로 꼽힐 만큼 중요한 고전이다. 이 『열자』의 저자가 바로 춘추전국시대 도가사상가였던 열어구(列禦寇), 곧 열자이다.

기원전 400년을 전후해 정(鄭)나라의 포(圃) 땅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열자는 기원전 500년을 전후해 활동한 또 다른 도가사상가인 노자보다는 시대적으로 뒤지고 기원전 370년에서 기원전 280년경을 살았던 장자보다는 시대적으로 약간 앞선 인물이다.

다만 『열자』가 진짜 열자의 저서인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란이 존재하는데 한나라의 저명한 학자 유향은 그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열자의 책은 후대에 와서 소홀히 다루어져 혹은 빠뜨리거나 혹은 잃어버리는 바람에 민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전하는 사람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사기』에 제자백가의 열전을 썼던 사마천은 열자에 대해서는 열전을 쓰지 않았다.”

어쨌든 『열자』가 과연 열자가 쓴 책인가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이 책에는 역사가 시작된 이후 오늘날까지 인간이 분명한 답을 찾고 있지 못한 철학적 주제. 즉 “생사(生死)와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은 운명에 달려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는가?”라는 문제를 매우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필자의 주목을 끌었던 대목은 운명을 다룬 제7편의 첫 시작을 열고 있는 ‘운명과 능력 사이의 논쟁’이다.

먼저 능력이 운명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장수(長壽)와 요절(夭折), 부귀와 빈천은 모두 나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운명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팽조(彭祖)의 지혜는 요임금과 순임금보다 위에 있지 않았지만 팔백 살이나 살았다. 안연의 재주는 보통 사람들보다 아래에 있지 않았지만 서른두 살밖에 살지 못했다. 공자의 덕(德)은 제후들보다 아래에 있지 않았지만 큰 곤란을 겪고 큰 곤경에 빠졌다. 은나라 주왕의 행실은 기자, 비간, 미자(微子) 세 사람보다 위에 있지 않았지만 임금으로 군림했다. 또한 백이와 숙제는 충절을 지키다가 수양산에서 굶어죽었고, 힘으로 권력을 전횡한 노나라의 계씨(季氏)는 덕으로 명성을 떨친 전금(展禽: 유하혜)보다 부귀를 누렸다. 만약 능력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어째서 재주 없는 사람은 장수하는 반면 재주 있는 사람은 요절하는 것인가? 어찌하여 성인은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반면 사람의 도리를 거스르는 자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인가? 어찌하여 착한 사람은 빈천(貧賤)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악한 사람은 부귀를 누리는 것인가?”

가만히 듣고 있던 능력이 운명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만약 그대 운명의 말대로라면 나 능력은 본래부터 인간사와 세상사는 물론 온갖 사물에 대해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셈이군. 그렇다면 세상 모든 일과 온갖 사물이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대 운명이 그렇게 만든다는 말인가?”

운명은 말한다.

“이미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운명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달리 있겠는가? 나 운명은 곧은 것은 곧은 대로 밀고 굽은 것은 굽은 대로 놓아둘 뿐이다. 장수하는 것도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고, 요절하는 것도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스스로 궁색한 지경에 처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존귀(尊貴)해지는 것이고 스스로 미천(微賤)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부유해지는 것이고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나 운명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이 바로 운명이고, 따라서 운명은 세상 그 무엇의 작용으로도 변할 수 없다는 게 열자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에 대한 열자의 견해는 일종의 숙명론(宿命論)에 가깝게 들린다.

그렇지만 위의 ‘능력과 운명의 대화’의 결론 격에 해당하는 운명의 답변, 즉 “운명이란 것도 따져보면 자기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운명은 -하늘과 같이- 그것을 통제하는 절대적인 그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옛 사람은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능력과 운명 중 과연 어떤 것이 인간사와 세상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칠까? 아마도 독자들 중에서는 ‘능력’의 손을 들어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운명’의 손을 들어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능력으로 운명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능력’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운명’의 손을 들어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온전히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야 할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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