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숨길 수 없고 마음은 속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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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숨길 수 없고 마음은 속일 수 없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4.2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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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인문학] 제2강 천명편(天命篇)…하늘의 명(命)을 따르라③

[명심보감 인문학] 제2강 천명편(天命篇)…하늘의 명(命)을 따르라③

[한정주=역사평론가] 玄帝垂訓曰(현제수훈왈) 人間私語(인간사어)라도 天廳(천청)은 若雷(약뢰)하고 暗室欺心(암실기심)이라도 神目(신목)은 여전(如電)이니라.
(현제가 훈계를 내려 말하였다. “사람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말이라고 해도 하늘이 듣는 것은 마치 우레 소리 같이 크게 들리고, 어두운 방안에서 마음을 속인다고 해도 귀신의 눈은 번개 같이 밝게 본다.”)

현제(玄帝)는 도교의 신선으로 현천상제(玄天上帝)를 줄여 말한 것이다. 『명심보감』에는 불가(佛家)의 말은 전혀 실려 있지 않지만 노자나 장자 또는 포박자와 같은 도가사상가의 말은 물론이고 상상속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도교의 신선이 남긴 말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도가사상이나 도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포용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 이 구절은 말이란 아무리 은밀하게 한다고 해도 반드시 듣는 귀가 있어서 결국 바깥으로 새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말이면 구태여 비밀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고, 악한 말이면 은밀하게 할 필요도 없이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세상에서 속일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하늘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자신을 닦을 때 무엇보다 ‘무자기(無自欺)’를 역설하고 ‘신독(愼獨)’을 강조했다.

무자기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뜻이고, 신독은 “홀로 있을 때 더욱 삼가라“는 뜻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홀로 있을 때에도 더욱 삼가는 사람에게 무엇을 더 요구하겠는가?

앞서 언급했던 범엽의 『후한서』 열전 중 〈양진열전(楊震列傳)〉을 읽어보면 청백리(淸白吏) 양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양진은 ‘관서(關西)의 공자’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학문과 ‘사지선생(四知先生)’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특히 양진이 ‘사지선생’이라고 불리게 된 고사(故事)를 읽다보면 사람의 언행에 있어서 ‘신독(愼獨)’과 ‘무자기(無自欺)’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를 깨닫게 된다.

늦은 나이에 벼슬에 나아가 형주자사를 지낸 양진은 뒤이어 동래태수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 지금의 산동성)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창읍 현령 왕밀은 일찍이 양진이 형주자사로 있을 때 천거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왕밀은 양진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한밤중에 남몰래 황금 열 근을 갖고 와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밤중이라 어두워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양진은 정색을 하고 왕밀을 엄하게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하늘이 알고(天知), 귀신이 알고(神知), 내가 알고(我知), 그대가 알고 있다(子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何謂無知)”

양진의 엄중한 꾸짖음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낀 왕밀은 황급히 물러갔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양진을 ‘사지선생’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청렴결백한 인품과 기상을 흠모했다.

세상의 이목(耳目)을 속인다고 해도 하늘과 귀신의 이목(耳目)은 속일 수 없고, 설령 요행으로 하늘과 귀신의 이목(耳目)을 속인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마음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고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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