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몰락 이후 국제통화시스템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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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몰락 이후 국제통화시스템의 미래
  • 박원석 기자
  • 승인 2013.11.2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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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금융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UC버클리대 경제학 교수인 배리 아이켄그린은 <달러 제국의 몰락(원제: Exorbitant Privilege)>에서 달러의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미국 달러는 단순히 미국의 통화를 넘어서 세계의 통화였다. 또한 국제거래에 사용되는 지배적인 단위이자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가 대외 지급을 위해 보유하는 준비통화였다. 100달러짜리 지폐의 4분의 3 이상이 미국 밖에서 통용되고 있다. 유가도 달러로 매겨진다. 미국을 거치지 않는 수출입을 포함한 국제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화폐로 쓰이는 것도 달러다.

한국과 태국은 대미 수출 비중이 20퍼센트에 불과한데도 80퍼센트가 넘는 국제거래에서 달러로 가격을 표시한다. 세계적으로 달러를 이용하는 외환거래의 비중은 85퍼센트에 달한다. 전 세계의 중앙은행들은 외환보유고의 60퍼센트 이상을 달러 표시 채권으로 쌓아두고 있다. 이 모두는 달러가 국제통화로 대접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국제금융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UC버클리대 경제학 교수인 배리 아이켄그린은 <달러 제국의 몰락(원제: Exorbitant Privilege)>에서 달러의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이켄그린은 단순히 달러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금융 패권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또한 달러가 앞으로 세계경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는 달러의 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국제통화시스템은 어떻게 변모할지 달러 몰락 이후의 전망을 제시한다.

조가비구슬을 사용하던 나라가 어떻게 국제금융을 장악했을까
달러의 상승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초기에 미국 대륙에 상륙한 청교도 이주자들은 조가비구슬을 화폐로 활용했다. 신생 미국 달러가 미국 조폐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792년 화폐주조법이 발효되면서였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부터였으나 달러의 국제적 위상은 매우 낮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벨기에 프랑이 미국 달러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에는 중요도 측면에서 다른 모든 경쟁 통화들을 따돌렸다. 1920년대 후반에 달러 표시 환어음의 액수는 파운드 표시 해외 환어음의 액수보다 두 배나 많았다. 1914년에 뒤늦게 경주에 뛰어든 달러가 1925년부터는 파운드를 앞지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달러가 파운드를 앞질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셈이다.

프랑스 전 대통령 발레리 데스탱은 달러가 유일한 국제통화의 지위에 오르자 미국이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을 누린다고 불평했다. 미국인 관광객은 뉴델리에서 환전하지 않고 달러로 택시비를 낼 수 있다. 미국의 수입업자는 직원과 납품업자들에게 돈을 지불할 때 그냥 ‘지불’하면 된다. 미국의 조폐국이 100달러짜리 지폐를 만드는 데는 몇 센트밖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똑같은 돈을 얻기 위해 반드시 실질적인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독일 기업은 중국에 기계를 수출하고 대금을 달러로 받아서 다시 유로로 바꿔야 한다. 다른 나라 기업인이나 중앙은행은 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걱정해야 하지만 미국 기업인이나 연준은 환율을 무시하고 살아온 것이다.

아이켄그린은 미국도 다른 통화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외국 중앙은행들은 연준이 환율변동중후군 환자 모임에 가입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 특권을 계속해서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일까?

▲ 미국은 국제통화를 보유한 국가로서의 책임을 완수하기보다는 특권을 개발하는 데 열심이었다.
‘국가가 없는 통화’ 유로, ‘국가 개입이 너무 많은 통화’ 위안
미국은 국제통화를 보유한 국가로서의 책임을 완수하기보다는 특권을 개발하는 데 열심이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의 사정은 오히려 더 나아졌다.

“미국의 해외투자는 달러 약세로 그 가치가 늘어났다. 다시 말해서 해외투자에 따른 이자와 배당금을 환전하면 더 많은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달러 절하로 미국이 얻은 이익은 거의 4,5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해외부채의 가치는 아무 변동이 없는 가운데 해외투자의 달러 가치가 그만큼 상승한 것이다. 이 이익은 6,600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에 따른 부채 증가분을 크게 상쇄시켰다. 덕분에 미국은 총생산보다 6퍼센트나 더 소비하면서도 해외부채를 거의 늘리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금융위기의 와중인 2008년에도 미국 정부는 저리로 거액을 빌릴 수 있었다. 외국인들이 그럼에도 달러가 가장 안전한 통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켄그린은 이에 대해 “국제금융체제를 위험에 빠트린 불장난에 기름을 대주는 것은 전혀 합리적인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더 이상 과도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국제금융체제의 새 판은 어떻게 짜야 할까? 위안과 유로는 달러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금융위기 이후 미국 달러의 영향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차세대 국제통화의 자리를 두고 위안과 유로가 달러와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달러의 경쟁 통화에는 결점이 있다. 유로화는 ‘국가가 없는’ 통화이고 위안화는 ‘국가의 개입이 너무 많은’ 통화이기 때문이다.

신흥 글로벌 통화는 달러도 그랬고 유로도 그랬듯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아이켄그린은 위안화를 주요 준비통화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리더십은 아직 금융 자유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중국을 독일보다는 1960년대 후반의 일본과 더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일본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엔화가 국제화를 이끌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준비통화가 되기 위해 환율을 조작하는 것을 무역수지 때문에 부담스러워했다.

▲ 금융위기 이후 미국 달러의 영향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차세대 기축통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무엇이 현존하는 여러 통화 간 거래의 국제적인 매개물이 될 수 있을까? 아이켄그린은 금본위제나 다른 상품본위제가 다시 출현할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더 가능한 대안은 IMF가 만든 국제준비자산인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 SDR)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SDR이 일상적인 국제 통화 매개체로 상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는 이에 대해 “추상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표현한다. 글로벌 정부가 없는 한 글로벌 중앙은행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SDR을 발행하는 과정은 꽤나 번거롭고, SDR이 거래될 수 있는 사적 시장도 없다. 또 달러와 유로를 합한 몫은 SDR을 포함한 다른 통화의 80퍼센트에 근접한다.

아이켄그린은 국제통화의 자리가 하나뿐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근본적인 오류라고 말한다. 그는 향후 중국 인근 국가들은 위안으로, 유럽 인근 국가들은 유로로, 미국 인근 국가들은 달러로 거래하는 시대, 즉 복수 국제통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오직 한 국가만 국제통화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깊이와 넓이를 지닌 금융시장을 가지라는 법은 없다. 20세기 후반에는 한 나라만 그런 금융시장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국제금융시장의 내재적 특성이 아니다. 따라서 복수의 국제통화가 공존하는 시대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유로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중국도 복수의 국제통화가 공존하는 시대를 추구한다. 중국의 의도는 달러의 왕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은 지나칠 만큼 달러에 투자한 상태다. 그러나 중국은 달러 투자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위안화에 보다 국제적인 역할을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다. 인도의 루피나 브라질의 헤알 같은 신흥국 통화들도 위안화가 나아간 길을 따를 것이다.”

달러 폭락, 최악의 시나리오
미국의 상황이 달러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우려를 촉박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며 세계 최대의 금융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유로에 연동된 통화는 27개인 데 비해 달러에 연동된 통화는 54개(2009년 중반 기준)나 될 만큼 국제거래에서 지배적인 기준통화로서의 현직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다. 아이켄그린은 시장 패닉이나 정치적 분쟁 때문에 달러가 폭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해외자본이 왜 달러의 폭락을 막아줄 수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외국 정부들은 정치적 계산을 떠나서 재무부와 연준을 도와 달러의 폭락을 막는 것이 이득이다. 달러가 폭락하면 수출경쟁력이 크게 약화되고, 투자자들이 가만히 앉아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달러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제금융체제를 안정시키는 일에는 모든 나라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따라서 미국의 주요 채권국들도 시장에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연준과 마찬가지로 다른 중앙은행들도 시장 개입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관련된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파국을 막을 것이다.”

아이켄그린은 달러 폭락의 가장 현실 있는 시나리오는 미국의 재정정책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이 시나리오는 미국의 재정적자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가정한다. 투자자들이 미국의 상황이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다면 한꺼번에 출구로 몰려갈 것이다. 해외투자자들이 국채를 투매하면서 채권가격이 폭락하고 금리가 폭등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면 미국은 유럽이 2010년에 겪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시달릴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단시일 내에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전례를 보건대 위기를 피하는 데 필요한 단계를 밟을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아이켄그린은 그럼에도 “달러의 운명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며 “증세와 재정지출 삭감을 동시에 시행”하는 등 미국이 현명하게 대처한다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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