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스스로 깨달아 터득해야 한다”
상태바
“글은 스스로 깨달아 터득해야 한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3.07 08: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①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①

[한정주=역사평론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필자가 얘기한 글쓰기 철학으로 글을 잘 지을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지금까지 말한 9가지 글쓰기 철학은 밥 또는 반찬이고 필자는 그 밥과 반찬을 요리해 제공한 요리사일 뿐이다.

요리사의 역할은 밥과 반찬을 만들어 제공할 따름이고 요리사가 차려준 밥상에서 어떤 음식을 골라 먹을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고 더불어 그 음식을 잘 소화해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드는 것 역시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글을 쓰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가 차려준 글쓰기의 철학과 방법 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깨닫고 터득해 자신만의 글을 쓸 것인가는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여러분의 몫일 뿐이다.

이제부터는 직접 글을 쓰고 스스로 깨달아 터득해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러한 까닭에 필자가 강의할 글쓰기 철학의 최종 단계 역시 ‘자득(自得)’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까닭 때문에 멀게는 강희맹과 김종직에서부터 유몽인, 허목, 박지원, 이덕무, 채제공, 정약용, 홍길주, 김정희, 이학규는 물론이고 가깝게는 최한기에 이르기까지 문장의 일가(一家)를 이룬 대가들은 거의 대부분 ‘자득(自得)’의 묘리(妙理)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자득(自得)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조선 전기 세종 때의 대학자이자 명문장가인 강희맹은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특별하게 지은 ‘훈자오설(訓子五說)’의 두 번째 설에서 ‘자득(自得)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재미있게도 도둑이 자신의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친 옛이야기로 ‘자득의 묘리’를 깨우쳐 준다. 여기에서 강희맹은 ‘스스로 깨우쳐 얻는 것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도둑질조차 할 수 없고 또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물며 도둑질조차 이러한데 학문과 문장을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깨우쳐 얻는 것이 없다면 무엇에 쓰겠느냐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글이다.

“백성 중에 도둑질을 직업으로 삼은 자가 있어 그 자식에게 그 술법을 다 가르쳐주니 그 자가 또한 그 재간을 자부하여 자신이 아비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언제나 도둑질을 할 적에는 그 자식이 반드시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나오며, 경한 것은 버리고 중한 것을 취하며, 귀로는 능히 먼 데 것을 듣고 눈으로는 능히 어둔 속을 살피어 도둑들의 칭찬을 받으므로 제 아비에게 자랑삼아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의 술법과 조금도 틀림이 없고 강장한 힘은 오히려 나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면 무엇을 못하오리까.” 하니 아비도 역시 말하기를 “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요, 자득이 있어야 되는데 너는 아직 멀었다” 하였다.

자식이 말하기를 “도적의 도는 재물을 많이 얻는 것으로 공을 삼는 법인데 나는 아버지에 비해 공이 항상 배나 많고 또 내 나이 아직 젊으니 아버지의 연령에 도달하면 마땅히 특별한 수단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니 아비 도적이 말하기를 “멀었다. 내 술법을 그대로 행한다면 겹겹의 성도 들어 갈 수 있고 비장(秘藏)한 것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차질이 생기면 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형적이 드러나지 않고 임기응변하여 막힘이 없는 것은 자득(自得)의 묘가 없으면 못하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하였다.

자식은 그 말을 듣고도 들은 척도 아니하니 아비 도적이 다음날 밤에 그 자식과 더불어 한 부잣집에 가서 자식을 시켜 보장(寶藏) 속에 들어가게 하여 자식이 한참 탐을 내어 보물을 챙기고 있는데 아비 도적이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주인으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주인이 집에 도적이 든 줄 알고 쫓아 나와 자물쇠를 본즉 전과 같으므로 주인은 안으로 들어가 버리니 자식 도적은 보장 속에 들어서 빠져 나올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손톱으로 빡빡 긁어서 쥐가 긁는 소리를 내니 주인 말이 “쥐가 보장 속에 들어 물건을 절단 내니 쫓아버려야겠다” 하고는 등불을 켜고 자물쇠를 끄르니 자식 도적이 빠져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가 모두 나와 쫓으니 자식 도적이 사뭇 다급하여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못가를 돌아 달아나면서 돌을 집어 물에 던졌다. 쫓던 자가 “도적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고 모두 막아서서 찾으니 자식 도적이 이 틈에 빠져나와 제 아비를 원망하며 하는 말이 “날 짐승도 오히려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자식이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도 욕을 보입니까” 하니 아비 도적이 말하기를 “이제는 네가 마땅히 천하를 독보할 것이다. 무릇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 배운 것은 한도가 있고 제 마음에서 얻은 것은 응용이 무궁하다. 하물며 곤궁하고 답답한 것이란 능히 사람의 심지를 견고하게 만들고 사람의 기술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내가 너를 곤궁하게 만든 것은 바로 너를 편안하게 하자는 것이요, 내가 너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바로 너를 건져 주기 위한 것이다. 네가 만약 보장에 갇히고 사뭇 쫓기던 환란을 당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쥐 긁는 시늉과 돌을 던지는 희한한 꾀를 낸단 말이냐. 네가 곤경에 부닥쳐 지혜를 짜내고 기변에 다다라 엉뚱한 수를 썼으니 지혜가 한 번 열리기 시작하면 다시 현혹되지 않는 법이다. 네가 마땅히 천하를 독보할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과연 천하에 적수가 없는 도적이 되었다.

무릇 도적이란 지극히 천하고 악한 기술이지만 그것도 반드시 자득(自得)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에 적수가 없는 법이다. 하물며 사군자(士君子)가 도덕공명(道德功名)을 뜻함에 있어서랴.

대대로 벼슬하여 국록을 누리던 후손들은 인의가 아름답고 학문이 유익함을 모르고서 제 몸이 이미 현달하면 능히 전열(前烈)에 항거하여 옛 업을 무시하니, 이는 바로 자식 도적이 아비 도적에게 자랑하던 시절이다.

만약 능히 높은 것을 사양하고 낮은 데 거하며 호방한 것을 버리고 담박한 것을 사랑하며 몸을 굽혀 학문에 뜻하고 성리(性理)에 잠심하여 습속에 휩쓸리지 아니하면 족히 남들과 제등할 수도 있고 공명을 취할 수도 있으며 써주면 행하고, 버리면 들앉아서 어디고 정당하지 않은 것 없으리니, 이는 바로 자식 도적이 곤경에 부닥치자 지혜를 짜내서 마침내 천하를 독보하는 것과 같다.

너도 또한 이와 근사하니 도적이 보장에 갇히고 사뭇 쫓기는 것과 같은 환란을 꺼리지 말고, 마음에 자득히 있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경홀히 말라.” 강희맹, 『동문선(東文選)』, ‘훈자오설(訓子五說) 도자설(盜子說)’

물론 자득(自得)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약 자득에 이르게 되면 무궁무진한 응용의 묘(妙)를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또한 자득의 묘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맹자는 자득(自得)에 대해 말하였다. ‘군자가 참 경지로 들어가는 데 있어 도(道)로서 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얻으려 하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얻으면 사는 데 편안해지고 사는 데 편안해지며 깊이 탐구한 도가 더 깊어지고 깊이 탐구한 도가 더 깊어지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도의 근원과 합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스스로 얻으려 하는 것이다.’” 맹자,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