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곧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글이다”
상태바
“글이 곧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글이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2.22 0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⑫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⑫

[한정주=역사평론가] 주자성리학과 대척점에 서 있던 양명학의 대가(大家) 하곡 정제두의 외손자로 조선의 유일무이한 양명학파인 강화학파의 계보를 이으면서 경학(經學)과 실학(實學) 그리고 노장학(老莊學)에 이르기까지 두루 밝았던 신작이 지은 ‘자서전(自敍傳)’ 또한 ‘글은 나 자신’이라는 자의식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작은 정약용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으며 또한 깊은 학문적 교류를 맺을 만큼 학식과 견문을 갖춘 대학자였다.

특히 자찬묘지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서전’에서 신작은 자신은 벼슬을 버리고 평생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고 밝히면서 오로지 집안에 있던 수천 권의 비밀스런 전적(典籍)을 뒤적이고 세상에 없는 문헌(文獻)을 내키는 대로 보고 지내는데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과 뜻은-당대의 지식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긴-주자성리학을 넘어 훨씬 더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더 넓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자서전’은 현재 경기도 광주 무갑산의 신작 묘택에 ‘자표(自表)’로 돌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심경호 지음, 『내면기행-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 이가서. 2009. p569 참조)

“신작의 자(字)는 재중(在中)으로 해서(황해도) 평산부 사람이다. 아버지 대우(大羽)는 유림의 오랜 명망이 있어 문학과 견식, 위의와 행실로 세상에서 존중을 받았다. 원자궁의 요속으로 뽑히고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신작은 어려서부터 곧고 깨끗한 지조를 지녔고, 자라서는 고요하고도 먼 뜻을 품어 기이한 것을 높이고 옛것을 좋아했으며, 학문의 세계를 사랑하여 경전을 섭렵해서 본 바가 많았다. 일찍이 모시(毛詩)의 학을 전공하고, 아울러 제자백가를 종합해서 『시차고(詩次故)』 22권과 외잡(外雜) 1권, 이문(異文) 1권을 지어, 그것들이 집에 전한다.

처음에 작(綽)은 형 진(縉), 아우 현(絢)과 함께 집에서 어른의 뜻을 기쁘시도록 맞추어드렸다. 하지만 형은 집안 범절을 다잡고 아우는 몸소 봉록으로 어버이를 봉양하였지만 작은 재주가 영리에 뛰어나지 못한 데다가 본성 또한 담담하여 오직 문묵(文墨)과 장궤(杖几)를 부친의 슬하에서 주선했고 종복과 자제를 거느리는 일, 신을 나르고 띠를 받드는 일, 베개와 이불을 거두는 일, 방과 대청을 두루 쓰는 일을 하고, 아울러 편지 쓰는 일로 어버이의 뜻을 보필하고, 감상이 어버이의 뜻에 맞도록 했다. 그래서 이 갈 나이(7-8세)부터 수염이 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마치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 같이 했다.

금상 9년(1809년·순조 9년) 아버지를 따라 성천도호부에 갔는데, 성천도호부는 현(絢)이 어버이를 봉양키 위해 외직에 보임된 곳으로 서울로부터 700리나 떨어져 있었다. 그 11월에 증광지 경과(원자 탄생으로 말미암음)를 시행하게 되자 부친께서 권하여 보내시면서 ‘내 생각에 이번에 가면 꼭 붙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인간사에 익숙치 않으니 결국은 너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하셨다.

작이 서울에 간 지 한 달 남짓하여 유사(有司)에게 나아가 대책(對策)을 시험하여 제1등이 되었다. 하지만 부친의 병환이 갑자기 위중하심을 듣고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렸건만 도착하기 전에 부음을 들었다. 이것은 산 사람의 다시없는 슬픔이며 씀바귀독 같은 극도의 슬픔이다. 작이 생각하기를 자식으로 하잘 것이 없으니 편찮으실 땐 약 한 번 못 써보고 염습할 때 옷 늘어놓은 것을 보지 못했고 유언도 듣지 못했으며 관은 이미 굳게 덮이고 말았다. 그 허물을 뒤에 생각해보니, 그것을 실로 과거 탓이었다.

삼년상을 마치자 근심을 머금고 아버지의 무덤에 과거합격을 아뢰고 다시 생존 시의 말씀으로 내리 슬픔을 고하고 필부의 뜻을 펴기를 빌고 마침내 영리의 길에서 뜻을 끊고 묘 아래에 머물렀다. 그때 형은 익위사 부솔로부터 신녕현(경상도)의 원이 되었고, 아우의 벼슬은 재상의 반열에 올라 벼슬하면 승진했고 내쳐지면 물러났다. 나이 또한 모두 예순 줄 안팎으로 서로 한 집에서 살았으며 상자에 제 것을 감추는 일이 없고 일은 한 사람이 늘 주관함이 없었으며 한 몸 같이 고루 사랑하여 마치 한 몸의 손이 스스로 돕듯 했다.

집안에 고대 서적이 수천 권인데 대부분 비밀스런 전적이요, 세상에 없는 문헌이다. 한가히 지내면서 여러 경전과 공문서를 뒤적이고 역사서와 문예서를 내키는 대로 보고 명물학과 수리학을 종합하여 읊고 앞 시대의 기이한 자취를 담화하고 토론하면서 세상에 영화와 치욕이 있음을 몰랐다. 이조에서 직첩의 예에 따라 자리를 옮기기 전에 승진하여 홍문관 응교에 이르니 전후로 군주의 명령이 모두 여남은 차례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벼슬살이 명부에 이름이 오른 사람인데 어찌 끝내 안 갈 수 있겠는가?’ 하기에 작이 ‘예전에 벼슬했다가 그만둔 사람이 어찌 벼슬살이 명부에 이름이 올랐다고 해서 구애받은 적이 있습니까? 게다가 선인께서 이미 세상에 쓰이기 적당치 않음을 아셨기에 벼슬을 버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사전에 미리 아셔서 벼슬을 버리고 편안히 하라고 하셨으니, 이대로 돌아가 뵙더라도 좋지 않겠습니까?’ 했다.

작이 이미 숲 언덕에 뜻을 맡겼으니 혹 일 년 내내 서울에 들어가지 않고 대지팡이에 삿갓 쓰고 맑은 물에서 물장난치고 우거진 숲에서 나무새를 가리며 때때로 넘치고 출렁거리는 물가에서 낚시질하고 작은 배로 고기잡이 하는 일을 속세가 이르지 않는 곳에서 했다. 혹자는 나를 가리켜 벼슬과 봉록의 문제를 마음에 들이지 않으니 이는 고인에게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한다.

작은 평소 말을 잘할 줄 몰랐으되 말하지 않음을 능사로 삼아 손님이 오더라도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을 뿐이다. 집에 있으면서 어떤 때는 종일토록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하여 맑고 평안하며 간솔하고 태평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다.

때로 도가의 서적을 즐겨 비록 신명과 부합함도 없고 진인과 동무함도 없지만 화락하여 홀로 흔쾌했다. 무릇 사물은 만 품이나 되지만 몸보다 중한 것이 없고 몸은 온갖 몸체로 이루어졌으되 마음보다 귀한 것이 없다. 따라서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외물에 부림을 당하는 일은 어진 이라면 하지 않는 법이다. 이 때문에 구함도 없고 바람도 없이 맑디맑게 스스로 편안하다.

요컨대 오욕도 명예도 미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름이나 자취나 모두 스러지게 하련다. 내 평소 심회는 이와 같을 따름이다. 금상 19년(1819년. 순조 19년) 납월(12월) 갑자의 날에 적다.” 신작, 『석천유집(石泉遺集)』, ‘자서전(自敍傳)’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