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작위 느낌 빼버린 간결하고 담백한”…성현·경전의 말과 글에서 벗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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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작위 느낌 빼버린 간결하고 담백한”…성현·경전의 말과 글에서 벗어나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8.01.05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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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⑤
▲ 미수 허목과 그의 필적.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⑤

[한정주=역사평론가] ‘글은 곧 그림’이고 ‘그림은 곧 글’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글을 쓰는 이가 자기 자신의 삶과 뜻을 글로 옮겨 적는다는 것은 곧 화가가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의 심리나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문인의 심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자화상과 자전적 기록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고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자 성찰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화상이 ‘그림으로 그린 자서전’이라면 앞서 소개한 이들의 자서전적 기록은 모두 ‘글로 쓴 자화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탐구와 성찰은 ‘타자화된 자아’보다는 ‘온전한 자아’를 찾으려는 이의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리학이 본격적인 정치권력이자 지식 권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지식인(선비)의 정신세계를 전면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조선 시대에는 자화상이나 자전적 기록이 존재할 정신적 공간이나 여백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성리학이 이상으로 여긴 군자(君子)나 성현(聖賢)을 삶의 모델로 삼은 지식인(선비)은 내면적인 인품은 물론 외양적인 풍모까지 그들을 닮고 싶어 했다. 이러한 선비들은 성리학을 통해서만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들에게 ‘나’란 존재는 성리학에 의해 ‘타자화된 나’이다.

조선 시대의 인물화(초상화)에 담겨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인물화를 많이 보면 볼수록 개성미(個性美)보다는 인위적인 전형미(典型美)를 확인하게 된다. 즉 성리학이 이상으로 여긴 성현의 인품과 풍모에 가능한 한 가깝게 그려주는 것이 화가의 도리이자 의무였다고나 할까?

이러한 사상적 풍조나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미덕(美德)이 아니라 일탈이다. 전문적인 화가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문인화가들이 있었지만 ‘자화상’ 다운 ‘자화상’을 남긴 사람은 공재(恭齋) 윤두서와 표암 강세황 밖에 없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림으로 그린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화상이 거의 전해오는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성리학적 규범에 지배받거나 성현(聖賢)의 정신세계에 구속당한 전형적인 지식인(선비)상과 작위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작가 정신과 자신만의 개성을 마음껏 발산한 자전적(自傳的) 기록 역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당시 문인의 미덕은 성현(聖賢)과 경전(經典)의 말과 글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주자성리학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혁신적인 사유와 개성적 미학과 창의적인 글쓰기를 추구한 지식인과 문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부터 직접 자기 자신을 소재와 주제로 삼아 쓴 ‘자의식’이 충만한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성리학의 시선과 생각이 아닌 혹은 성리학의 전형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하고 싶고 좋아하며 잘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 즉 온전한 자아를 담은 개성미 가득한 글들이 넘쳐난다.

그 선두 그룹에-앞서 소개했던-서계 박세당과 미수 허목과 표암 강세황이 있고, 후발 주자이지만 가장 강렬한 자의식을 드러냈던 청장관 이덕무와 초정 박제가가 있다.

먼저 17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주자학의 수호신을 자처하며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행사했던 우암(尤庵) 송시열과 치열한 예학(禮學) 논쟁을 벌였고, 주자성리학적인 유학 해석을 거부하고 스스로 원(原) 유학(儒學)인 육경학(六經學)을 연구했다.

도가는 물론 불교에 대해서까지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송시열과 그 추종 세력들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큰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상은 독특한 그의 작호(作號)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 ‘눈썹 늙은이’라는 뜻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호를 지어 썼는데, 그 이유에 대해 ‘자명비(自銘碑)’라는 글에서 “늙은이의 눈썹이 길어서 눈을 덮었다. 그래서 자호(自號)를 미수(眉叟)라고 하였다”고 적었다.

권위나 작위(作爲)의 느낌을 확 빼버린 지극히 자연스럽고 소박하면서도 뭔지 모를 멋을 느끼게 하는 자호만큼 간결하고 담백한 자서전적 기록이다.

“늙은이는 허목 문보(許穆文父)라는 사람이다. 본관은 공암(孔巖)인데 한양(漢陽)의 동쪽 성곽 아래에서 살았다. 늙은이는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으므로 스스로 호를 미수(眉叟)라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손에 ‘문(文)’ 자 무늬가 있었으므로 또한 스스로 자를 문보(文父)라 하였다.

늙은이는 평생에 고문(古文)을 매우 좋아하였다. 일찍이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고문으로 된 공씨전(孔氏傳)을 읽었다. 늦게야 문장(文章)을 이루었는데 그 글이 대단히 호방하면서도 방탕하지 않았다. 특별한 것을 좋아하며 혼자 즐겼다. 옛사람이 남긴 교훈을 마음으로 추구하여 항상 스스로를 지켰다. 자기 몸에 허물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는데 잘하지는 못하였다. 그 자명(自銘)은 다음과 같다.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言不掩其行 /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 行不踐其言 / 한갓 요란하게 성현의 글을 읽기만 좋아했지 徒嘐嘐然說讀聖賢 / 허물을 보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無一補其諐 / 그래서 돌에 새겨 書諸石 / 뒷사람들에게 경계를 삼게 하는 바이다 以戒後之人’” 허목, 『미수기언(眉叟記言)』, ‘자명비(自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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