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새와 곤충, 풀과 나무는 천지의 문장이요, 문장이란 인간을 장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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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와 곤충, 풀과 나무는 천지의 문장이요, 문장이란 인간을 장식하는 것”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10.26 0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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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⑧
▲ 겸재 정선의 '백운동'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⑧

[한정주=역사평론가] 더욱이 한양 한복판에 자리한 소완정(素玩亭)에 기거하면서 날마다 새와 곤충과 풀과 나무등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꼼꼼하게 엿듣다 얻게 된 시정(詩情)과 시상(詩想)을 시(詩)로 옮겨서 『소완정금충초목권(素玩亭禽蟲草木卷)』을 엮은 이서구는 사물에 대한 완상(玩賞)과 자신의 취향과 기호 모두가 다름 아닌 글감이자 문장이라고 밝혔다.

필자가 주장하는 “글은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에서 나와야 가장 좋다”는 ‘완상(琓賞)과 기호(嗜好)의 미학’에 근접한 문장론이다.

“나는 도시 한복판에 살고 있어서 이웃한 곳이 모두 드넓은 대로와 골목길이라 자연을 즐기고 인생을 구가하기에 적절한 들녘과 산림의 멋이라곤 없다. 오로지 소완정이 집 안의 중앙에 제법 높다랗게 솟아 있어 시야가 탁 트여 시원스럽고 담장 뒤편에는 몇 그루 나무가 서 있어 해마다 여름이면 그늘을 만드니 들보에 그늘이 감돌 때면 푸른빛이 짙게 드리운다.

그럴 때면 나는 날마다 그 속에서 쉬면서 새와 곤충, 풀과 나무에 속하고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물이면 어느 것이나 눈으로 세밀하게 살피고 귀로는 꼼꼼하게 엿들었다.

그리하여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바로 시로 읊어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결과 새는 16편을 얻고 곤충은 10편을, 풀과 나무 역시 각각 9편씩을 얻어 모두 합해보니 44편이었다.

그때 어떤 손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들은 ‘이하(李賀)는 문장을 지을 때 꽃과 새, 벌과 나비라는 소재를 벗어나지 않아서 결국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오로지 지극히 미미한 사물을 관찰하고, 아무 쓸모없는 것에 정신을 소모하니, 저 이하의 경우에 가까운 것 아닌가요?’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답하였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저 바윗돌은 둥그렇게 놓여 있는 단단한 물건에 불과합니다. 그 물건이 산꼭대기나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으면 사람이 지나가다 보고서는 ‘저기 둥그렇고 단단한 물건은 바윗돌이야’ 라고 아무 생각 없이 대강 말하고 맙니다.

그들 가운데 조금 자중하는 사람들조차 ‘저기 둥그렇고 단단한 물건은 바윗돌인데, 그것은 흙이 뭉쳐서 단단해진 것이야’ 라고 말합니다. 그러고서는 눈썹을 추켜올리고 눈동자를 크게 굴리면서 사물의 이치를 신통하게 이해한다고 의기양양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은 모릅니다. 사물을 헤아려 물건을 처음 만드는 학자는 바윗돌의 거칠고 가는 무늬와 옆으로 퍼지고 종으로 가파른 형세를 꼼꼼히 살핍니다. 그 색깔을 분별할 때에는 나방 눈썹 같은 녹색인지, 쑥 잎 같은 청색인지를 나누며, 그 재질을 구분할 때에는 문리(文梨)가 얼어서 반짝이는 것인지, 거북 등이 터져서 어떤 징조를 나타내는 것인지를 나눕니다.

한쪽은 움푹 들어가고 한쪽은 돌출한 것 같은 작은 현상조차 감히 조금도 무시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부여한 특징을 소홀하게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새는 날고 곤충은 구물거리며 풀은 싹을 틔우고 나무는 우뚝 솟아올라 수만 가지의 모양이 같지 않고 제각기 그 자태를 뽐냅니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고서 나는 것은 새요 구물거리는 것은 곤충이라 하고 싹을 틔우는 것을 풀이라 부르고 우뚝 솟아오른 것을 나무라 부른다고 알 뿐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저들의 가슴속에는 새와 곤충, 풀과 나무라는 겨우 네 가지 어휘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 네 가지 어휘가 옛날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분명 그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 새와 곤충, 풀과 나무는 천지의 문장이요, 문장이란 인간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문장을 장식하고자 한다면 천지에 있는 문장을 빌려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먼 옛날의 성인께서는 책을 써서 명명하는 것에서부터 가옥이나 의복, 수레, 깃발, 그릇 등을 장식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저 네 가지에서 뜻을 취하고 형상을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천지를 가득 메운 사물 가운데 이들을 제외하면 다른 사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해오는 말에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안다’는 것이 있고, 사람들이 ‘높은 산에 올라서는 시를 짓고 풀을 만나면 반드시 기록해둔다. 이것이 경대부(卿大夫)의 재능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은연중 그러한 취지에 부응하고자 합니다.’

그랬더니 그 손님이 ‘좋은 말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내가 쓴 것을 모아서 『소완정금충초목권(素玩亭禽蟲草木卷)』을 엮었다.” 이서구, 『척재집(척재집)』 ‘소완정금충초목권서(素玩亭禽蟲草木卷序)’

더욱이 이서구는 연경(燕京: 북경)에서 들여온 푸른빛의 앵무새를 얻어난 이후 앵무새에 깊게 탐닉하여 나이 17세가 되던 1770년(영조 46년) 무렵 앵무새에 관한 각종 문헌 기록과 정보를 총망라해 ‘앵무새에 관한 경전’이라는 뜻의 『녹앵무경(綠鸚鵡經)』을 편찬하기도 했다.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십분 살려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눈을 뜨고, 여기에다가 다시 감히(?) 경전(經典)이라는 권위까지 빌어 책을 제목을 붙인 것만 보아도 이들이 얼마나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완상(玩賞)과 기호(嗜好)’에 대한 벽(癖: 고질병)을 글쓰기의 소재와 주제로 삼는 것을 좋아하고 즐겼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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