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하고 우아한 사대부의 삶에 딱 어울리는 유일한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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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하고 우아한 사대부의 삶에 딱 어울리는 유일한 사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9.0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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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①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⑫…완상(玩賞)과 기호(嗜好)의 미학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앞서 필자가 수없이 반복해 말했듯이 성현(聖賢)의 삶을 최고의 미덕이자 가치로 여겼던 성리학의 정신세계가 지배하던 시대에 개성적 자아나 개인의 취향과 기호는 배척되어야 할 무엇이었다.

물론 그러한 때에도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니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삶에서 취향과 기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결코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사대부 출신의 지식인과 문인들의 취향과 기호라는 것도 성리학의 세계에 구속당하고 속박당했다.

예를 들면 성현(聖賢)을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나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할 육예(六藝) 등은 이른바 ‘우아하고 고상한’ 취향과 기호로 존중받았지만 만약 그 밖의 취향과 기호를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천박하고 저속한’ 부류의 인간으로 취급당했다.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인 ‘매화’에 취해 자신의 서재 이름을 ‘매헌(梅軒)’라고 한 이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준 춘정 변계량의 글을 읽어 보자.

여기에서 변계량은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온갖 사물이 생동(生動)하지 못할 때 오로지 매화만은 찬바람을 뚫고 꽃을 피워 세상에 맑은 향기를 가득 퍼뜨리는 모습이 지조(志操)높고 고결(高潔)한 인품을 가진 군자의 풍모(風貌)를 닮았다고 해 옛 선비들은 그것에 지극한 사랑을 쏟았다고 밝히면서 매헌의 주인 되는 중려(中慮)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매화를 사랑하고 취하기에 마땅하다고 찬미하고 있다.

“예전 내가 성균관의 학도(學徒)였을 때 중려(中慮)라고 하는 생원이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균관에서 경전 강의와 문장 저술로 명성을 떨쳤는데, 당시 선비들은 모두 그의 실력과 재주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나 또한 그 모습과 말을 접해보고는 그의 사람됨을 마음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5~6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느 날 중려가 내게 말하기를 “내 서재의 이름을 매헌(梅軒)이라고 이름붙이고 여러 친구들에게 시가(詩歌)를 써 달라고 부탁하려 하네. 자네는 나를 잘 알고 또 나와 벗한 지 오래되었네. 그러니 내게 매헌기(梅軒記)를 써 주어 시가(詩歌)의 실마리로 삼도록 해주지 않겠나?”라고 했다.

대개 매화는 또한 꽃나무의 하나이다. 꽃나무는 보통 봄과 여름에 화려하게 피웠다가 추위가 닥쳐오면 시들어버린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모든 사물은 계절에 따라 피었다가 지고, 무성했다가 시든다.

그런데 유독 매화만은 추위를 이겨내고 이른 봄, 만물이 채 싹트기도 전에 새하얀 꽃망울을 찬란하게 터뜨린다.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어떤 사물보다 먼저 만물을 소생(所生)시키고 생동(生動)하게 하는 태양의 기운을 얻은 것으로, 진실로 다른 꽃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옛 시인과 지조 높은 선비들 중에는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려가 서재의 이름을 매화로 취한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중려는 사람됨이 강개(慷慨)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출중하다. 또한 시를 잘 짓고, 마음속은 한 점 먼지도 없이 깨끗하다. 대체로 청백한 사람 가운데에서도 청백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매헌(梅軒)이라는 서재 이름은 그의 사람됨과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겠는가!

향기로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달빛이 간들간들 나부낄 때 중려가 매헌(梅軒)에 앉아서 손에 서책을 들고 음미하면 매화로부터 터득한 마음의 감흥이 있을 것이다. 그 광경을 어찌 붓과 글로 모두 표현해 드러낼 수 있겠는가!” 변계량, 『춘정집(春亭集)』, ‘매헌기(梅軒記)’

늙은 매화나무 세 그루의 기이한 풍경을 사랑해 자신의 집에 ‘삼매당(三梅堂)’이라고 이름 붙인 정모(丁某)라는 이가 세상 사람들이 화원(花園) 가득 피어 있는 온갖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버려둔 채 구태여 매화를 취한 것을 의아해하자 스스로 매화나무를 사랑한 까닭을 구구절절 설명한 이야기를 글로 옮긴 장유의 ‘삼매당기(三梅堂記)’에서도 매화를 고상하고 우아한 사대부의 삶에 딱 어울리는 유일한 사물로 지목하고 있다.

“광주(光州)는 호남의 이름난 고을이다. 서석산(무등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과 계곡, 숲과 시냇물의 풍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땅이 기름져 백성의 생활이 넉넉하다. 누각과 정자, 정원과 동산 또한 많아 서로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정모(丁某)라는 사람의 집안은 예부터 선비의 법도를 지녀 평소 마을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정모는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초옥 몇 칸을 짓고 도서(圖書)로 온 방 안을 빙 둘러 놓았다. 그리고 앞뒤로 대나무와 작약(芍藥)을 섞어 심어 초옥을 감쌌다.

그곳에는 늙은 매화나무 세 그루가 처마 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그런데 매화나무의 가지가 기이하게 뻗어 내려 창문으로 드는 햇빛을 가렸다. 이에 매화나무 세 그루의 기이한 풍경을 취해 그 집의 이름을 ‘삼매당(三梅堂)’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삼매당(三梅堂)’이라는 집의 이름을 듣고서 의아해하며 말했다.

“정모의 화원에는 온갖 꽃들이 다 모여 있다. 붉은 빛과 자주 빛 그리고 짙은 색과 옅은 색의 꽃들이 봄·여름·가을·겨울 내내 끊이지 않고 피어 있다. 그 풍성하고 화려한 풍경으로 말한다면 매화나무 세 그루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집의 이름을 내걸면서 아름다운 꽃의 풍경은 내팽개치고 볼 품 없는 매화나무를 취했다. 아마도 정모는 아름다움을 즐기는 취향에 결함이 있는 듯 하다.”

이 말을 듣고 난 정모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안목이 어찌 그렇게 천박한가. 선비가 사물을 취할 때 자신의 눈을 만족시키는데 그친다면 무엇인들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곳에 자신의 뜻을 담고자 한다면 어찌 아무것이나 함부로 취할 수 있겠는가.

내 화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아주 많다. 따사로운 햇볕이 드는 봄날에서 누런 나뭇잎이 떨어지는 가을날까지 쉼 없이 피고 진다. 우아하고 고귀한 품격을 드러내는 꽃에서부터 요염한 자태를 보이다가 말없이 사라지는 이름 없는 꽃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나의 눈을 즐겁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꽃들은 화려함과 요염함을 서로 다투면서 자신을 위해 비와 이슬의 자양분을 받아먹을 뿐이다. 그러므로 꽃의 화려하고 요염한 빛깔은 덕(德)을 즐기는 선비가 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꽃과 더불어 서로 화려함과 요염함을 다투지 않고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도 자신의 격조를 잃지 않으면서 변함없이 맑은 향기와 높은 품격을 보여주면서 고아(高雅)한 선비와 어울릴만한 대상을 찾는다면 매화나무를 내버려두고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매화나무의 풍경을 보라. 눈서리가 내려 모든 꽃이 시들거나 얼어버린 상황에서는 비록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나 대나무라고 할지라도 내 정원을 향기로 가득 채우지 못한다.

바로 그때 매화나무 세 그루가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며 우뚝 솟아 빼어나게 아름다운 색채를 내뿜기 시작한다. 기묘한 향기와 차가우면서도 요염한 모습이 내 방 깊숙이 스며들어 가야금과 서적에 비치곤 한다. 그러면 내 마음은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맑고 깨끗해진다.

이 매화나무 세 그루야말로 내게 세 가지 이로움을 주는 벗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유,『계곡집』, ‘삼매당기(三梅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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