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부자는 재물만 좇지만 큰 부자는 사람을 좇는다”…종합상사의 시조 백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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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부자는 재물만 좇지만 큰 부자는 사람을 좇는다”…종합상사의 시조 백달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6.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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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⑭ 최초의 전국적 상인 단체 조직…보부상의 시조이자 영웅
▲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권용정의 보부상 그림(왼쪽·간송미술관 소장)과 18세기 행상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⑭ 최초의 전국적 상인 단체 조직…보부상의 시조이자 영웅

[한정주=역사평론가] 재물에 투자해 얻는 이익은 제아무리 크다고 해도 재물에 그치지만 사람에게 투자해 얻는 이익은 재물을 넘어선다. 역사상 이러한 경영의 이치를 깨달은 상인들은 한 나라의 상업은 물론 천하의 권력까지 자신의 수중에 둘 수 있었다.

역사상 사람에게 투자해 얻는 이익의 가치와 원리를 터득하고 실천해 천하를 호령한 대표적인 상인으로는 중국 진나라의 여불위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진나라의 왕족 자초(子楚·훗날의 장양왕)를 임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진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십수 년 동안 중국 대륙을 손아귀에 쥐고 호령할 수 있었다.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볼모로 끌려와 곤란을 겪고 있는 자초를 본 여불위는 “진귀한 재물은 사둘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다음 그를 찾아 나섰다. 여불위를 만난 자초는 그의 웅지(雄志)를 떠보기 위해 “당신의 가문부터 크게 만든 후에 나를 크게 만들어 주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여불위는 겸손하고도 호기 어린 어조로 “나의 가문은 당신에게 기대어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이 대답에 자초는 여불위가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고, 이후 두 사람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여불위는 재물을 투자해 재물을 버는 방식으로는 한 나라의 상계(商界)를 주름잡는 거상 이상의 지위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불위의 야심과 욕망은 거상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천하를 움켜쥘 수 있는 정치권력을 수중에 둔다면 천하의 상계는 물론 끝을 알 수 없을 만큼의 재물이 저절로 자신의 발아래로 굴러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여불위가 치산(治産)의 전략을 재물에 대한 투자에서 사람에 대한 투자로 전환한 이유였다. 그리고 진나라와 자초는 그의 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해줄 전략적 선택인 셈이었다.

조선의 상인 중에서도 여불위 못지않은 야심과 포부 그리고 전략적 사고력을 지닌 인물이 있다. 조선 개국 초기 팔도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보부상들의 전국 조직인 임방(任房)을 조직해 팔도상권을 장악한 백달원은 여불위처럼 사람에게 투자해 얻는 이익의 가치를 이해한 대상인이었다.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는 초라한 행상에 불과했던 백달원이 전국 보부상의 지도자가 되고 나라에서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한 사람만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부보상(보부상) 인장이라는 뜻)’이라는 옥도장까지 하사받는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찍부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협력한 안목과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 물건을 팔러 가는 보부상단의 행렬.

백달원과 태조 이성계의 인연은 고려시대 말경 여진과의 전투현장에서 처음 맺어졌다. 당시 함경북도 만호 벼슬을 지내던 이성계는 여진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때 이성계를 지게에 짊어지고 구출해낸 사람이 바로 황해도 토산 출신의 행상 백달원이다. 그 후 이성계가 천하를 담을 만한 그릇을 갖춘 인물임을 알아챈 백달원은 그의 적극적인 협력자이자 조력자가 되었다.

백달원은 이성계가 전쟁터로 나갈 때마다 자신의 밑에 있던 토산 출신의 보부상들을 내보내 후방 지원을 맡도록 했다. 그리고 백달원 부하들은 왜구에 맞서 싸운 황산대첩에서 또 한 번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곤경에 빠진 이성계를 구해내는 수훈을 세웠다.

백달원과 그 휘하 보부상들의 공적은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전국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고 민심의 동향을 파악해 이성계에 맞서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일은 물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 위해 필요한 민심과 여론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후에도 백달원은 이성계에 대한 협력과 조력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그는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를 증축할 때 나한상을 옮겨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삼척에서 안변까지 5백 나한상을 운반하는 대역사에 드는 인력 동원과 막대한 비용을 아낌없이 지불한 것이다.

이로써 이성계는 개국 초기 열악한 나라 재정 때문에 오랫동안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백달원의 도움으로 해결할수 있었다.

그 후 개국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태조 이성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백달원의 공로가 새삼 떠올랐다.

이성계는 백달원을 궁궐로 불러들인 후 그간의 공로를 칭찬하면서 보답할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일찍부터 이성계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적극 협력한 백달원의 야망과 상술이 마침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백달원은 자신은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이성계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성계가 거듭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전국의 행상을 보살펴달라고 청했다.

이에 이성계는 명령을 내려 백달원에게 전국 팔도에 흩어져 있는 행상들을 조직할 수 있는 권한과 건어물·소금·목기·토기·수철 등 다섯 가지 물품에 대한 전매특권을 주었다. 전국의 행상들에 대한 처분권과 더불어 주요 생활필수품의 전매특권까지 한꺼번에 거머쥔 백달원은 이제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백달원은 개성의 발가산에 보부상 본부인 임방을 설치하고 조선 팔도의 수십 만 행상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또한 다섯 가지 생활필수품에 대한 전매권으로 거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더욱이 백달원이 나라에서 하사받은 ‘유아부보상지인장’은 관청과 벼슬아치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특권까지 제공해주었다.

이성계를 알아본 안목과 눈앞의 이익을 떠나 사람에게 아낌없이 투자한 경영 전략으로 백달원은 일찍이 어떤 상인도 오르지 못한 부와 권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전국적인 상인 단체를 조직한 백달원은 지금도 상인들 사이에서 보부상의 시조이자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백달원은 전국의 보부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얻은 다음에도 ‘사람의 마음을 얻어 이익을 구하는 경영’의 가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사람에게 투자해 얻는 이익의 가치를 이해한 사람답게 재물이란 반드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상도(商道)를 지켰을 때 비로소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명심했다.

당시 그가 조선의 상인들에게 전한 한 가지 가르침은 다름 아닌 ‘득인심역득재물(得人心亦得財物) 실인심필실재물(失人心必失財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되면 재물 역시 얻지만 사람의 마음을 잃게 되면 반드시 재물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경영 철학과 전략은 당시 임방 소속 보부상임을 증명한 채장(신분증)의 뒷면에 적혀 있던 네 가지 규율에도 잘 드러나 있다. 보부상이라면 누구나 이 규율을 생명처럼 소중히 다루어야 했다.

그것은 첫째물망언(勿妄言·함부로 말하지 말라), 둘째 물패행(勿悖行·패악무도한 행동을 하지 말라), 셋째 물음란(勿淫亂·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 넷째 물도적(勿盜賊·도적질을 하지 말라)이다.

언뜻 보면 장사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말인 듯하지만, 이 네 가지 규율에는 “민심과 인심을 잃으면서 재물을 구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곧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수단과 방법 또는 부정한 행동을 통해 재물과 장사의 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백달원은 사람에게 투자하는 경영의 가치를 십분 활용해 당시 상인의 신분으로서는 감히 꿈꾸기 힘든 성공을 거두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한 거상이 될 수 있었다.

▲ 이두호의 만화 『객주』에 등장하는 보부상들.

오늘날에도 좋은 평판과 이미지로 사람의 마음을 얻은 기업이나 상품은 실제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또한 사람을 우선시 하는 경영은 회사에 대한 사원들의 충성도와 일체감을 높여준다.

작은 부자는 재물만 좇아도 재물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부자가 되려면 반드시 사람을 좇아야 한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경영만이 재물 이상의 알파와 오메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국 초기 백달원이 세운 상도(商道)와 규율은 조선 말기인 19세기까지 정신적으로 보부상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품을 이고 지고 이익을 좇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특성 때문에 보부상들은 상술(商術) 못지않게 상도와 규율을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고 시장 및 유통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거짓말과 속임수로 물품을 판매하는 일 또는 동료 보부상이나 소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행동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이러한 까닭에 상업 윤리를 지키고 철저한 서비스 정신을 가졌을 때에야 비로소 ‘뜨내기 장사꾼’이 아닌 ‘명실상부한 보부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51년 작성된 충남 예산지역 보부상 조직의 규율을 보면 그들 보부상 집단이 매우 철저하게 상업 윤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규칙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처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직 규율은 비단 예산 지역의 보부상뿐만 아니라 당시 전국 팔도의 모든 보부상 조직이 당연히 갖추고 있던 것이다.

이렇듯 구체적인 규율은 백달원 때부터 내려온 이른바 보부상의 4대 강령, 즉 ‘물망언(勿妄言), 물패행(勿悖行), 물음란(勿淫亂), 물도적(勿盜賊)’과 더불어 보부상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했다.

보부상은 4대 강령과 각자 스스로 정한 조직 규율에 따라 일찍부터 훈련받았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상업 윤리를 기준 삼아 장사를 했다. 그 상업 윤리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상품과 더불어 소비자에게 신용과 인격을 함께 판매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 번 장사해 남기는 이익보다는 상품을 팔고 맺은 소비자와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라는 보부상 특유의 상술과 상도가 낳은 상업 윤리였다.

보부상 조직은 수요자와 소비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상품을 판매한 점에서 ‘조선의 종합상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특유의 개척 정신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고 새로운 교통로를 연 조선 경제의 중추 세력이었다.

또한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고 이익만 챙기고 떠나면 그만인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라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채 물건과 더불어 신용과 인격까지 함께 판매한 진정한 세일즈맨이었다.

그런 점에서 국내 시장과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모든 이에게 필자는 한번쯤 시장과 소비자를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보부상의 유목민적 상술(商術)과 더불어 상품뿐만 아니라 신용과 인격까지 함께 판매했던 상리(商理)를 연구해보라고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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