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최초의 여성 CEO 소현세자빈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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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최초의 여성 CEO 소현세자빈 강씨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5.1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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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⑬ 17세기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시장을 개척하다
▲ 창작집단 오광스튜디오가 디자인한 ‘한국을 빛낸 10인의 일러스트’ 중 소현세자빈 강씨.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⑬ 17세기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시장을 개척하다

[한정주=역사평론가] 10여 전 경영전략의 최대 화두로 ‘블루오션(blue ocean)’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다.

경쟁자 없는 자신만의 시장은 CEO라면 누구나 꿈꾸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블루오션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자신의 경쟁자는 물론 소비자들조차 모르는 전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하는 관문을 넘어서야 한다.

따라서 블루오션 전략에서는 무엇보다도 시장, 상품, 서비스, 마케팅, 고객 등을 기존의 관습적 사고와는 다르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블루오션은 기존의 시장을 지배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자신만의 시장을 창출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경영인들 가운데에서도 자신만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블루오션 전략으로 큰 부와 성공을 일군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유독 신분 혹은 성(性)의 장벽을 뛰어넘어 성공 신화를 이룩한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이었던 토정 이지함이 신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라면 제주 거상 김만덕은 여성이면서 기생 출신이라는 성의 장벽을 허문 사람이다.

이렇듯 당시 사회를 두텁게 감싸고 있던 신분과 성의 장벽을 뚫은 사람들 중에서 블루오션의 주인공이 많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곧 블루오션 전략의 핵심이 기존의 관습적 사고에 구애받지 않는 전혀 새로운 시각과 창의적인 사고력을 요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앞서 언급했던 토정 이지함이나 김만덕 역시 블루오션 전략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지만 조선의 경영인들 중에서 이 경영전략을 가장 뛰어나게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으로는 단연 소현세자빈 강씨가 돋보인다.

상업에 뛰어들 수도 없고 뛰어들어서도 안 되는 존귀한 신분인 세자빈의 몸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17세기 당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 시장을 새롭게 개척했기 때문이다.

◇ 나라와 개인의 굴욕을 시장 개척의 기회로 삼다
조선의 제16대 임금인 인조의 며느리이자 소현세자의 아내였던 강빈(姜嬪)은 조선사 최초의 여성 전문경영인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특히 그녀는 생산과 무역을 결합하는 선진적인 경영 기법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던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평생을 구중궁궐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녔던 세자빈의 몸으로 그녀는 어떻게 조선과 청나라 간 국제 무역 시장의 개척자가 될 수 있었을까?

강빈은 17세에 소현세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 그녀의 나이 27세가 되었을 때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병자호란)에서 패배해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참혹한 패배는 강빈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어버렸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따라 강빈 역시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빈은 자신의 불행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철의 여인’이었다. 오히려 세자빈이라는 신분적 속박과 온갖 인습·관습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청나라 생활은 여태까지 꼭꼭 닫아놓았던 강빈의 잠재적인 능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강빈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어느 정도 터를 잡은 후부터 그 능력을 상업 활동과 국제 무역에서 발휘하기 시작했다.

강빈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상업과 국제 무역에 적극 나서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먼저 그녀는 소현세자를 따라 인질로 끌려와 심양관에서 함께 생활하는 192명 대식구의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소현세자가 정치적·외교적 문제나 청나라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을 배우는 데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강빈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몫이라고 판단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강빈이 상업과 국제 무역을 통해 돈을 벌어서 전쟁 패배의 희생양으로 청나라에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다시피 한 조선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생계수단을 만들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 정복 전쟁의 후유증을 말끔히 씻지 못해 물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청나라의 지배 계층인 여진족은 유목 민족이어서 상업과 무역 활동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강빈은 이 점을 눈여겨보았다. 즉 조선의 질 좋은 물품을 들여오면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 시장을 개척할 수 있고 또한 지배 계급인 여진족을 상대로 고가의 사치품을 판다면 큰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 국제 무역과 현지 생산의 결합
강빈이 심양관 생활을 시작한 지 3년이 다 되어 가던 1639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여러 가지 물품 부족에 시달리던 청나라 심양의 팔왕(八王)이 조선에 무역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팔왕은 은밀하게 은자 500냥을 보내 조선에 면포(綿布), 표범가죽, 수달가죽, 족제비가죽, 꿀, 잣 등을 거래하자고 요구했다. 팔왕은 청나라를 세운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의 열둘째 아들로 당시 정치적·군사적으로 조정 안팎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실력자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17년 9월12일자 기록에는 조선의 조정이 팔왕의 요구를 받아들여 공식적인 무역 거래를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심양의 팔왕이 은밀하게 은자 500냥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면포, 표범 가죽, 수달 가죽, 청서(靑鼠) 가죽, 청밀(淸蜜), 백자(栢子) 등의 물품을 무역할 것을 요구했다.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의 물꼬가 트이게 되자 강빈은 재빠르게 불모지나 다름없는 시장을 선점하며 장악해나갔다. 처음 조선에서 들여온 물건으로 큰 이익을 얻은 강빈은 청나라의 팔왕이 요청한 물품 이외에도 종이나 괴화(槐花) 등의 약재, 생강 심지어 담배까지 다양하게 거래 물목을 확대해나갔다.

평소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오랑캐로 천시해온 풍조와 병자호란의 패배가 남긴 참혹한 후유증 탓에 17세기 조선의 양반 사대부나 조정 관료들은 청나라와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심지어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 길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 팔왕의 무역 요청에 대해서도 조정 관료들은 실제 경제적 실리를 계산하기보다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에 내몰려 마지못해 응했을 뿐이다.

이렇듯 명분과 체면에 사로잡혀 있던 탓에 조선은 정작 대제국(大帝國)으로 성장하고 있던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으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에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강빈은 왕족이나 사대부가 금과옥조처럼 떠받든 대의명분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제국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조선의 실제 이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는 조선-청나라 간 국제 무역 시장이 무한한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강빈과 동시대를 산 조선의 사대부와 관료들은 조선-청나라 사이의 외교와 무역을 무력에 굴복한 결과물로 여겼지만 강빈은 오히려 무한한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국제 무역 시장을 새롭게 개척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던 것이다.

▲ 소현세자빈 강씨가 가 잠든 영회원(永懷園). 사적 제357호로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위치해 있다.

강빈이 청나라와의 무역 거래에 직접 나서자 심양관은 점차 일종의 국제 무역 시장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조실록』은 당시 심양관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진기한 물품들을 무역하느라 심양관 문 앞이 마치 시장과 같았다.”

이때를 전후해 강빈이 모은 재물의 가치에 대해서도 『인조실록』에 대략적이나마 기록되어 있는데 강씨 개인이 소유한 재물만 해도 은(銀) 1만650냥, 황금이 160냥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강빈은 조선-청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을 단순히 상품 교역시장으로만 한정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청나라 현지에서 조선의 선진적인 농사기술과 영농법을 도입한 곡물 생산 체제를 구축해 청나라 국내 시장에 진출한다면 국제 무역을 능가하는 막대한 재물을 모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요즘 식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 현지에 선진적인 생산기술과 경영 기법을 도입한 공장을 짓고 상품을 만들어 새롭게 중국 시장을 개척해 큰 이득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들의 ‘현지화 전략’과 비교할 만한 일이다.

처음 청나라는 인질로 끌고 간 소현세자 일행에 대해 식량을 지급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년) 이후부터는 농토를 떼어주면서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것은 소현세자 일행을 장기간 볼모로 붙잡아 두기 위한 일종의 억류 조치였다.

이 때문에 소현세자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청나라의 토지 불하와 농사 권유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조선으로의 귀국은 영원히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청나라 조정의 요구를 마냥 거부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강빈은 이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것이 현지에 생산 시설을 갖추고 현지 시장을 개척해 새로운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유목민족 출신인 탓에 농경에 익숙하지 않은 여진족의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많은 수확과 함께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당시 청나라는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중이어서 식량 문제가 심각했다.

이때 청나라가 제공한 농토가 야리강(野里江) 동남 왕부촌(王富村)과 노가촌(魯哥村) 두 군데에 각각 150일 갈이, 사하보(沙河堡) 근처에 150일 갈이, 사을고(士乙古) 근처에 150일 갈이였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에 따르면 하루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농토를 말한다. 청나라가 제공한 농토를 합하면 모두 600일 갈이였으니까 하루에 장정 600명의 노동을 동원해야 할 만큼 작지 않은 면적의 농토였던 셈이다.

어쨌든 처음 중국 한족(漢族) 출신 노예들을 사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강빈은 이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조선 사람들을 고용해 더욱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조선의 선진적인 농사법으로 수확한 쌀은 청나라의 일반 백성은 물론 지배 계층에까지 크게 인기를 끌어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이렇듯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강빈은 다시 현지에 곡물 생산 시설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심양관에서 생활하던 소현세자와 벼슬아치들이 조선 조정, 즉 승정원에 올린 일종의 보고 문서인 장계(狀啓)를 모아놓은 『심양장계(瀋陽狀啓)』에 따르면 다음해인 1642년(인조 20년)에 수확한 곡식이 3319석에 달했다. 당시의 표현대로 하자면 3000석(三千石)이 넘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농토가 척박하고 영농기술이 후진적이었던 청나라에서 거둔 수확치고는 대단한 양이었다.

특히 강빈은 재물이 모이기 시작하자 전쟁 패배의 희생양이 되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온 조선 백성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재물을 모으는데 그토록 전력을 쏟았던 이유가 일신의 부귀영화와 자신을 시종 드는 벼슬아치와 내시 그리고 하인들을 먹여 살리는 작은 뜻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드러났다.

강빈은 심양 이곳저곳을 가득 메운 조선인 노예의 통곡과 참상을 결코 잊지 않았다. 당시 인질이 되어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 백성이 수십만 명에 달했는데 많게는 60만명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강빈은 기회가 닿는 대로 한족 출신 농군들을 노예시장에서 탈출한 조선 출신 농군으로 대체해나갔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조선인 출신 농군들이 한족 출신 농군보다 더욱 열심히 자신의 일처럼 농사를 지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녀가 9년 동안의 심양관 생활을 접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 곡식 4700석을 남겨놓고 왔다고 하니 얼마만큼 큰 재물을 모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국제 무역과 곡물 생산을 결합한 이 독특하고 독창적인 경영 전략으로 강빈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낳은 자신만의 불루오션을 창출한 것이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고 생산-유통-소비의 현지화 전략을 통해 큰 성공을 일군 강빈은 오늘날에도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쟁하고 있는 모든 기업들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최신 경영 전략과 발전 모델을 몇 세대 앞서 실천한 선각자적인 여성 CEO였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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