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과 매뉴얼로 승부하라”…시장의 지배자 개성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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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과 매뉴얼로 승부하라”…시장의 지배자 개성상인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4.2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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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⑫ 500년 동안 조선 상권을 장악한 3가지 비결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⑫ 500년 동안 조선 상권을 장악한 3가지 비결

[한정주=역사평론가] 세계화 시대 다국적 기업의 글로벌 경영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1000년 동안 세계 제국을 유지한 로마식 경영 비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로마식 경영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첫째 미천한 계급 출신의 인물은 물론 자신의 적까지도 포용하는 개방성, 둘째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는 실력주의, 셋째 현장체험을 중시하는 인재교육 시스템과 리더십, 넷째 잘 갖추어진 시스템과 표준화된 매뉴얼 등은 로마식 경영법을 설명하는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상인 집단으로는 크게 경강(한양)상인, 개성상인, 의주상인, 평양상인, 동래상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개성상인은 전국을 연결하는 송방(松房)이라는 판매와 유통 시스템을 갖추고 조선 팔도의 상권은 물론 대중국과 대일본 무역을 장악했다.

더욱이 개성상인은 조선시대 내내 다른 상인 집단과의 경쟁에서 언제나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시장 지배자로서의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개성상인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숱한 도전자들의 경쟁을 물리치고 시장의 지배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가다 보면 그들만의 독특한 상인 조직 시스템과 경영 기법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로마식 경영법의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잘 갖추어진 시스템과 표준화된 매뉴얼의 특징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개성상인들은 오늘날 여러 전문가들이 성공 모델로 제시하는 로마식 경영법의 장점을 두루 지닌 조직 시스템과 경영 기법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시장 지배력의 기반…개성상인의 조직 시스템
개성상인의 독특한 상업 조직 시스템은 사용인(使用人) 제도와 송방(松房)으로 대표된다.

개성상인은 상업 거래의 규모가 커지고 국내는 물론 국외로까지 유통이 확산돼 나감에 따라 상업 활동의 전 과정과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제할 조직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상인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의 힘만으로 거대한 규모의 조직을 관리하고 방대한 양의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조직 시스템이 사용인 제도다. 대개 개성상인은 사용인(소유주)의 신분으로 차인(差人)-서사(書師)-수사환(首使喚)-사환(使喚)을 고용해 상업 활동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개성상인이라는 조직의 내부에서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전문인으로 활동했다.

먼저 조직 위계상 사용인 다음의 지위를 차지한 차인은 소유주인 사용인을 돕거나 혹은 대리해 영업상 발생하는 여러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전문경영인의 역할을 했다.

이들 차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사용인으로부터 빌린 자본과 상품에 대한 이자만 지불하고 상업 거래상의 이익이나 손해를 모두 차인이 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용인이 자본과 상품을 제공하고 차인이 판매한 후 이익금을 반반씩 나누어 갖는 경우다.

서사는 장부나 각종 문서를 작성하고 처리하는 회계 전문가의 역할을 했다. 이들은 보통 월급제로 고용되었다. 수사환은 행상이나 사환을 관리하는 일종의 현장관리자인데 일정하게 정해진 보수 없이 영업 실적에 따라 이익의 일부를 지급받았다.

마지막으로 사환은 말단 직원으로 상품 판매나 여러 가지 잡무를 처리했다. 일정한 보수가 없이 1년에 한두 번 물품을 제공받는 정도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사용인-차인-서사-수사환-사환의 조직 시스템은 확실한 위계질서와 각자의 역할에 따른 상업 활동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위계질서는 매우 개방적이고 유동적이어서 능력에 따라 승진은 물론 독립적인 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개성상인은 전국에 걸쳐 송방이라는 지점(분점)을 설치할 때 자신의 조직 시스템을 통해 경험을 쌓고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을 내보내 순식간에 지방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지방의 상업 중심지에 세워진 송방은 개상상인의 지점 혹은 분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상품을 매점하고 판매하는 방식으로 상거래를 주도했다.

이렇듯 효율적인 조직 시스템은 현장에서 수년간 혹은 수십 년간 경험을 쌓은 수많은 상인들을 길러내는 ‘인재의 저수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개성상인의 시장 지배력은 이 조직 시스템을 통해 배출되어 나온 사람들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문정창(文定昌)은 1941년 출간한 『조선의 시장』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개성상인의 조직 시스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해 기술한 바 있다.

1. 개성상인은 유소년 때부터 도제적(徒弟的)으로 10년 이상 양성한 점원이 지능과 상술이 숙달하여 쓰일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되면 그 점원을 차인(差人)으로 등용한다.
2. 주인(主人)은 차인에게 대하여 무담보로 연리(年利) 15% 정도의 저리(低利)로서 일정액의 자금을 대여하여 상업을 자영(自營)하게 한다.
3. 주인은 차인의 사업에 대하여 일체 간여 간섭하지 아니하며 연말결산에서 이익이 나면 그것을 차인과 주인이 반분(半分)한다.
4. 주인이 차인에게 대여하는 자금은 주인이 자기의 신용으로서 차득(借得)한 시변(時變) 돈으로서 한다. 시변(時變)의 연리는 13% 정도이니 주인은 차인으로부터 연 2% 정도의 차리(差利)를 받는다.
5. 처음 위와 같은 주인의 지원으로서 사업을 경영하여 점차 자본을 결성하게 되면 차인은 자립하는 것이다. 문정창, 『조선의 시장』, 부록 ‘차인제도(差人制度)와 시변(時變)’

다시 말해 개성상인의 힘은 개인 혹은 몇몇 특출한 상인의 재주와 능력에 의존했다기보다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조직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능력이 출중한 특정한 리더에 의존하는 조직은 그가 부재할 경우 위기에 노출되기 쉽다. 그러나 시스템에 의존하는 조직은 리더가 없다고 해도 그 시스템이 위기에 봉착하지 않는 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오랜 시간 시스템에 의해 훈련된 다른 리더를 쉽게 발굴해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 시대를 앞선 개성상인의 회계운영 매뉴얼 ‘사개치부법(四介置簿法)’
사용인 제도와 송방이라는 조직 시스템 이외에도 개성상인은 또 다른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그들만의 독특한 회계 처리 방식인 ‘사개치부법(四介置簿法)’이다.

사업 거래 규모나 유통 구조가 커지고 복잡해지면 질수록 상품 거래 내역이나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물품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장부를 기록해 거래 내역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라고 할 수 있다.

개성상인은 이러한 문제점을 자신들만의 독특한 장부 기록방법을 개발해 해결했다. 사개치부법이란 단어의 뜻 그대로 네 가지로 나누어 상품이 들어오고 나가는 거래 내역을 장부에 기록한 것이다.

개성상인은 이 회계 처리 방식에 따라 모든 상품 거래와 자본의 흐름을 채권, 채무, 매입, 매각의 네 가지로 구분해 장부에 기록했다.

▲ 개성상인의 후손 박영진씨가 소장한 1887~1912년 회계장부들.

사개치부법에 따라 기록한 장부는 크게 일기와 장책 그리고 각종 보조문서로 구성돼 있었다. 일기는 6하원칙(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에 따라 상품과 자본이 들고 난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고, 장책은 각각의 거래처나 손님과의 거래 내역을 기록했다.

특히 사개치부법은 대차평균의 원리나 거래 상호 간의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복식부기의 원리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개성상인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보다 2세기나 앞서 복식부기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여하튼 사개치부법은 개성상인들이 상점을 운영하고 상품을 거래하고 국제 무역에 나서는 현장 곳곳에서 일종의 경영 매뉴얼 역할을 했다. 즉 사개치부법의 회계 원리와 세부적인 매뉴얼에 따라 개성상인은 상품이나 금전 거래에서 부딪치는 각종 문제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한 사개치부법은 개성상인이 상품과 자본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고, 이 자료에 기초해 그들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영과 상업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 담보가 아닌 신용을 거래한 선진적 금융 제도 ‘시변제(時變制)’
개성상인은 언제 어느 곳에 있더라도 반드시 자신들만의 조직 시스템과 경영 매뉴얼에 따라 상업 활동을 수행했다.

또한 개성상인은 장사를 시키려면 자신의 아들일지라도 반드시 사환을 거쳐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장사하는 방법을 체득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개인적으로 독립해 장사를 해도 될 단계에 이른 개성 출신의 상인은 모두 조직 시스템을 통해 이미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경험과 노하우를 습득한 베테랑 상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욱이 개성상인은 사개치부법이라는 표준화된 경영 매뉴얼의 기본 원칙에 따라 자신의 상점과 상업 활동을 관리했다. 이 모두가 상업 활동에서 부딪칠 수 있는 온갖 위험과 위기로부터 개성상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조선의 상권을 지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개성상인의 사례는 독보적인 기술과 제품 개발 못지않게 독창적인 조직 시스템과 경영 매뉴얼 또한 시장을 지배하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1000년 동안 세계 제국을 유지한 로마나 500여년 동안 조선의 상권을 움켜주었던 개성상인의 사례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시간과 ‘세계 시장’이라는 공간을 상대로 피 말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기업과 조직들에게 공통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것은 잘 갖춰진 조직 시스템과 표준화된 경영 매뉴얼을 갖춘 기업은 오랫동안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승자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은 결국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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