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의 승부사’ 제주 거상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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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의 승부사’ 제주 거상 김만덕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3.1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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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 크게 흉년이 들자 김만덕이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제주 백성들을 구제하는 상상도.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⑨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라”

[한정주=역사평론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천재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천재란, 그 개인에게만 보이는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뻔히 보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기존의’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천재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천재의 개념은 흥미롭게도 블루오션 전략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이 말한 천재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을 꼽는다. 이 두 사람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전투 대형과 전술을 선보였고, 이 때문에 적은 숫자의 병력으로도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전쟁은 보병 중심의 전투대형과 전술을 갖추고 있었다. 기병은 존재했지만 숫자상으로도 미미했고 전투 현장에서도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전투의 승패는 언제나 보병의 전투력에 의해 판가름 났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은 보병과 기병의 기존 구성 비율을 바꾸는 한편 기병의 중요성과 기동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식의 전술을 창안했다. 즉 기병을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전력으로 한 전투 대형과 전술을 구사했다.

기존의 전투대형과 전술에서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한 기병의 중요성을 발견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3만6000명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해 다리우스 왕의 20만 대군을 물리쳤다.

또한 한니발은 75만명의 병력을 지닌 로마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에 쳐들어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고대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배수진(背水陣)을 구사한 한나라의 장군 한신이 그렇다. 그는 조나라 20만 대군과 맞선 정형 전투에서 10분의 1에 불과한 2만 군사로 승리했다. 이때 한신이 사용한 전투대형과 전술이 배수진이다.

전투가 끝난 후 한신의 부하 장수들은 “병법에서는 ‘산은 등지고 강은 앞에 두라’고 가르치는데 오히려 반대로 하고도 승리한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아난다’는 병법의 원리가 배수진이라면서 자신은 그것을 활용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렇듯 누구나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기존의 사실 속에서 전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사고력이 바로 ‘발상의 전환’이다.

이 같은 개념을 확대 적용해보면 기존의 시장, 제품, 서비스, 소비자 속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부자들 중 18세기 정조 시대에 제주 출신의 여성으로 거상이 된 김만덕의 경우가 이 ‘발상의 전환’ 개념에 가장 합당한 인물인 듯싶다.

▲ 김만덕의 표준영정.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상업이 크게 발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부자들 가운데 제주 출신의 거상을 찾아보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제주도는 따뜻한 기온, 사방을 둘러싼 바다, 드넓은 초목 지대라는 천혜의 자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육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여러 가지 특산물을 생산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이러한 특성을 간파한 육지의 일부 상인 집단들은 제주도의 특산품을 매점해 육지에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개성상인들이 갓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양태를 매점해 전국에 직접 독점 판매한 경우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인 양태는 보통 해남이나 강진 등지에서 모아져 육지의 중간 상인들에 의해 서울 시전에 전매되었다. 그런데 개성상인들이 양태를 직접 매점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것이다.

반면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특산품을 활용해 육지 상인과의 거래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갓양태를 매점한 개성상인과의 거래에서처럼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독점적 이익을 육지 상인들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거대 자금과 조직 규모를 갖춘 육지의 거대 상인 집단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벅찬 하잘 것 없는 제주도 상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만덕은 그들과 다르게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조선 팔도 전체가 제주도의 특산품을 판매할 수 있는 미개척 시장으로 보였다. 또한 반대로 육지에서는 생산되지만 제주도에서는 나지 않는 물품을 놓고 본다면 제주도 역시 미개척 시장이 될 수 있었다.

즉 김만덕은 제주도에서만 나는 특산품을 육지에 내놓아 판매하고 제주도에서는 나지 않는 물품을 육지에서 사 들여와 판매한다면 자신이 독점적인 시장 지배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치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어느 나라에 간 사업가들이 대부분 ‘이곳 사람들에게는 신발을 팔 수 없겠구나’라고 절망한 반면 그들과 다르게 오히려 ‘이곳 사람들 모두에게 내 신발을 팔 수 있겠구나’라고 기뻐했다는 어느 기업가의 일화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훗날 김만덕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난 후 ‘만덕전(萬德傳)’이라는 전기를 썼던 정조 시대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은 “만덕은 돈을 잘 버는 재주를 지녔다. 특히 시세 변동을 잘 알아 알맞은 때에 물품을 사고팔았다. 그녀는 크게 이름이 날 정도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 기록만 보아도 그녀가 제주도와 육지 사이의 물품 수요와 물가 변동을 얼마나 시의 적절하게 이용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김만덕은 제주도의 특산물인 녹용, 귤, 전복 등을 시세 변동에 따라 때맞춰 육지에 내다 팔고 또한 제주도 사람 특히 소비 규모가 큰 양반 사대부와 부유한 계층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이나 장신구 등을 육지에서 사들여 오는 방식으로 재산을 불려 나갔다.

이렇게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상업 활동을 통해 시장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다진 김만덕은 이후 관가의 물품을 조달하는 권리를 얻는 한편으로 제주를 드나드는 ‘선상(船上)들의 물품을 독점적으로 거래하는 여객주인권(旅客主人權)과 포구의 상품 유통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포구주인권(浦口主人權)까지 획득’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관청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김만덕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물품도 손에 넣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은 그녀가 일찍이 다른 상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시장과 고객의 가치를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블루오션이었다.

막대한 재물을 모은 김만덕이 그후 제주도에 크게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제주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후일담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선행 덕에 그녀는 정조로부터 내의원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하사받고 육지에 나가는 것이 금지돼 있는 제주도 여성의 신분임에도 한양을 구경하고 금강산까지 유람하는 영광을 누렸다.

▲ 김만덕이 정조를 알현하는 상상도.

정조가 제주 목사로부터 만덕을 재물을 풀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했다는 보고를 받고 상을 내리려고 하자 그녀는 상을 거절하고 “바다를 건너 서울에 들른 다음 금강산을 유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 일로 보더라도 그녀가 남다른 뜻과 포부를 지녔던 여장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평소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 그녀였기에 누구나 뻔히 알면서도 그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김만덕이 당시 사회를 옭아매고 있던 인습과 관습적 사고에 구속당했다면 제주도 출신이라는 사회적 한계에다 다시 여성이라는 성적 차별의 이중고를 뚫고 전국에 명성을 떨친 거상의 자리에 결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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