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의 경제학…“도덕과 윤리보다 물질생활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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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의 경제학…“도덕과 윤리보다 물질생활이 우선”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3.02 0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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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생활 경제학 완성한 경제학자…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④
▲ 서유구(왼쪽)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의 중요한 참고문헌인 『행포지(杏蒲志)』5~6권의 친필 원고본(오른쪽). 판심에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이라 인쇄된 원고용지에 필사됐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생활 경제학 완성한 경제학자…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④

[한정주=역사평론가] 경제학이란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재화가 인간 생활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논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덕이나 윤리적인 가치보다는 재화의 생산-유통-분배, 즉 물질생활의 가치를 우선해서 다루는 것이 경제학이다.

조선을 지배한 학문이자 이데올로기였던 주자성리학은 ‘도덕과 윤리’, 곧 정신적 삶의 가치를 유독 강조했다. 성리학자들에게 ‘도덕과 윤리’는 세계와 인간을 다스리는 근본 규범이었다. 물질생활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혹은 도덕과 윤리적인 가치보다 하위에 두는 한 경제사상의 싹은 결코 자라날 수 없다.

서유구는 이러한 성리학의 가치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의 경제사상은 바로 그곳에서 출발했다.

“나는 유독 농학에 힘을 쏟아 늙어서 기운이 다 하도록 중단하지 못했다. 왜 그러했겠는가? 나는 일찍이 유학의 경전을 공부했는데 말할 만한 것은 이미 옛 사람이 모두 말해버렸다. 내가 다시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될 것인가? 또한 내가 일찍이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을 공부했는데 글줄이나 읽었다는 선비가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거나 짐작해 하는 말은 모두 ‘흙으로 끓인 국’이요, ‘종이로 만든 떡’일 뿐이었다. 아무리 잘한들 실제 생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서유구, 『행포지』 ‘서문(序文)’ 중에서

이 때문에 서유구는 성리학의 가치를 앞세워 정신적인 삶의 고귀함을 내세우는 이른바 사대부들을 향해 “헛되이 곡식만 축낼 뿐 세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자로는 저술하는 사대부가 진실로 우두머리”라고 하는 한편 “나는 사대부들이 앉아서 논(論)하고, 일어나서 행(行)한다는 도(道:도덕과 윤리)가 무엇인지를 도대체 모르겠다”는 비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생활에 절실하게 필요한 학문 곧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이 아닌 학문은 모두 정신을 낭비하는 쓸모없는 짓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실용에 도움이 되는 학문만이 그에게는 진정한 학문이었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의 서문에 해당하는 ‘예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앞선 시대의 실학자인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모델로 삼아 저술한 책이다. 그것은 유학의 ‘도덕과 윤리’보다는 재화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삶, 즉 ‘물질생활’을 더 중요하게 다루는 『산림경제』의 경제철학을 추구하겠다는 뜻이었다.

도덕과 윤리를 비롯한 정신적 삶의 가치를 앞세운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부터 해방되어 재화의 이로움, 즉 물질생활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탄생한 경제학의 모토였다.

이런 점에서 서유구의 경제사상은 근대 경제학의 징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만약 조선이 일본과 서양의 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가 아닌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길을 걸었다면 일찍부터 서유구는 봉건시대의 경제이론과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위대한 경제사상가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서유구의 경제사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농업 개혁론’은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농업 기술 및 영농 방법을 개선해 농업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의 근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토지제도를 ‘둔전제(屯田制)’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부국안민, 즉 튼튼한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일이라고 서유구는 생각했다.

농업 개혁론에 관련한 서유구의 경제사상을 알 수 있는 문헌 및 자료는 정조 시절에 쓴 『농대(農對)』와 『순창군수응지소(淳昌郡守應旨疎)』 그리고 18년간의 향촌 생활동안 저술한 『임원경제지』와 『의상경계책(擬上經界策)』이다.

이 가운데 향촌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농업 기술과 영농 방법의 개혁론은 『임원경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조선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농업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은 효율과 이익을 중요시해,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모인다.’고 여긴 서유구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사람이 사는 지방은 제각각 다르고 생활 습관과 풍속도 또한 같지 않다. 생활하는 방식도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있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구별이 존재한다. 어찌 중국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해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필요한 방법들을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렸다.” 서유구, 『임원경제지』 ‘예언(例言)’ 중에서

토지제도의 개혁에 관한 서유구의 입장은 『농대』나 『순창군수응지소』에서처럼 초기 ‘한전론(限田論)’을 주장 하다가 이후 『의상경계책』에서는 ‘둔전론(屯田論)’으로 바뀐다.

서유구는 토지겸병(대토지 소유)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곤란과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모든 토지의 국가 소유와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해야 한다는 이상을 말년에 이르기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가 주장한 ‘한전론’은 당장 정전제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한 토지 개혁론으로, 우선적으로 대토지 소유의 폐단부터 없애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조 사후 세도정권(그들자신이 대토지 소유자였음)이 득세하는 바람에 ‘한전론’조차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 상황이 되자 최소한의 토지개혁 방안으로 서유구가 주장한 것이 바로 ‘둔전론’이다.

서유구가 주장한 둔전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주도해 설립하는 ‘시범농장’ 혹은 ‘협동농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둔전은 크게 국가에서 재정을 출자해 설치하는 ‘국둔(國屯)’과 부민(富民)으로 하여금 개인 재산을 출자하게 해 설치하는 ‘민둔(民屯)’으로 나뉜다. 앞의 것이 ‘국영 농장’, 뒤의 것이 ‘민영 농장’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싶다.

그런데 둔전론은 앞선 시대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균전론, 한전론, 정전론, 여전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둔전론이 전체 토지에 대한 개혁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일부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규모로 둔전을 설치하자고 주장한 점이다. 아마도 서유구는 세도정권 하에서는 전반적인 ‘토지 개혁’의 희망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러나 그는 세도정권의 ‘보수 반동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시범농장의 성격을 띠는 둔전을 일부 지역에서라도 설치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농업 기술을 적용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또 상업적 농업 경영을 통해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경제력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 그가 둔전설치를 주장한 곳은 한양의 동서남북 4곳과 북쪽 국경지대, 서남해안의 도서지역 등이었다. 그리고 전국 8도의 감영과 지방 고을에도 한양의 사례를 모방해 둔전을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둔전은 서유구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가학으로 익힌 농학과 그 후 숱한 간난에도 힘써 갈고 닦은 ‘농업 개혁론’을 시험해볼 수 있는 무대였다. 비록 둔전론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토지 개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유구 자신은 세도정권 하에서 실현 가능한 유일한 ‘농업 및 토지 개혁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년에 이르도록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삼은 ‘정전제’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둔전론은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온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외척벌열(外戚閥閱)이 권력을 독점·전횡한 세도정권 하에서는 ‘둔전론’과 같은 제한적 개혁론조차 발붙일 수 없었기 때문에 서유구의 ‘농업 개혁론’ 역시 다른 토지 개혁론과 마찬가지로‘실현 불가능한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806년 정계에서 축출당한 후 18년이 지난 1824년 마침내 서유구는 관직을 되찾는다. 그런데 관직생활을 다시 시작한 이후에도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의 저술·편찬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1827년에 이르러서야 『임원경제지』의 방대한 작업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보완 작업은 계속되었다.

서유구가 이토록 오랜 기간 방대한 규모의 저술·편찬 작업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외아들 서우보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현재 전해오는 서유구의 전 저술에는 아들 서우보가 교열자였음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서우보는 1827년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서유구의 아내는 그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말년의 서유구는 자신이 애써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걱정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그러한 비통한 심정을 담은 글이 현재 남아 있는데, 그곳에서 서유구는 “나는 수십 년 동안 저술에 공을 들여 『임원십육지』 백여 권을 최근에야 겨우 끝마쳤다. 그러나 책을 맡아 보관할 자식도 아내도 없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안대회, 『산수간에 집을 짓고』에서 재인용)고 했다.

실제 그는 죽을 때까지 『임원경제지』의 보완 작업을 계속하면서, 이 대저작의 간행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임원경제지』를 비롯한 수많은 그의 저술들은 필사본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 흩어졌다.

다만 손자 서태순과 증손자 서상유 등 후손들이 서유구의 뜻을 잇기 위해 그 저술들을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혹은 ‘풍석암서실(楓石巖書室)’이라고 찍은 종이에다 필사했기 때문에 그나마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럼 후대의 학자들 중 서유구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서유구는 젊은 시절 연암 박지원에게 드나들면서 학문을 배운 탓에 일찍부터 그 손자인 박규수 등과도 절친하게 교류했다.

서유구가 1845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박규수(1807년 출생)는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있었다. 따라서 서유구의 사상이 박규수의 근대 개화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 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 박규수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읽고 받은 감명을 자신이 지은 시를 통해 표현하기도 했다.

나라의 병폐를 치유하는 심오한 경륜을 지녔지만 향촌에서 농사짓고 나누는 일을 좋아할 뿐이네 『임원십육지』를 직접 구해 읽었는데 책에 온갖 보배 넘쳐나 신기루 속처럼 헤매게 되네 요즘 사람들은 사업(事業)과 공업(工業)을 천하다고 여겨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는 서책에 곰팡이가 필 지경인데 유독 공(公: 서유구)의 의론(議論)을 익히 들어보니 학문이 실용에 적합하지 않다면 진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하네. ‘환재 박규수 연구(2)’ 『민족문화사연구 8호』에서 재인용

비록 서유구의 경제사상을 온전하게 전승한 학자는 없었지만 그의 큰 뜻만은 박규수를 비롯한 근대 개화파 학자들에 의해 일부나마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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